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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 그럴 줄 알았다.

오는 전화 없고, 만나도 뻘쭘, 공통화제가 없다

흔히 은퇴의 적은 ‘돈, 건강, 외로움’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은퇴 후의 수입은 현역 때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때때로, 정기적으로 나오는 상여금이라든가 명절 휴가비, 성과급 등이 나오지 않는다. 때로 통장을 풍성하게 해주는 월급 이외의 돈이 없으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삶이 쪼그라든다.


거기다가 건강도 예전과 다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은퇴 후에 나는 반만 믿게 되었다. 물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열심히 노력하고 세상과 소통하려는 자세만 갖춰져 있다면 나이라는 장벽은 의미가 없다. 나이가 많아도 세상을 가볍게 넘어가며 아우라를 떨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찾아오는 예상치 않은 질병과 노화의 흔적은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무색하게 한다.


60대에겐 60대의 삶이, 70대에겐 그 나이만큼의 삶이 다가오는 것이다. 전과 달리 삐걱거리는 관절의 통증, 처지는 얼굴선, 하루가 다르게 가늘어지고 빠지는 머리카락. 보이는 부분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세상과 맞장 뜨기엔 자신감이 없어진 마음도 한몫한다.


은퇴하면 이전의 직장과 관련된 사람들과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미 소속이 달라진 사이고 공통화제가 없는 관계다 보니 만나도 할 말이 없다는 거다. 예의상 몇 번 볼 수는 있지만 이미 업무적인 면에서 관계가 끊겼기 때문에 서로 불편하다는 거다. 그래서 은퇴 후엔 전 직장 관련해서 오는 전화도 없고 만남도 없고 고립의 시기만 남아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다. 현역 때 같지는 않겠지만 은퇴 후에도 사람들과 교류하고 사소한 일상을 나누며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은퇴하고 보니 그들과의 공통화제가 없었다. 그들은 전투장과 다름없는 학교 현장에서 발에 땀이 나도록 뛰고 있는데 한가하게 집에서 지내고 있는 나와는 시간 배분이 일단 달랐다. 그리고 대화의 중심 소재인 아이들과의 교류가 내겐 없었다. 매일매일 전투장을 방불케 하는 현장에서 실전을 뛰고 있는 그들의 삶과 내 삶은 공통점이 없었다. 설령 안부를 서로 나눈다 해도 과거의 추억만 더듬을 뿐 현재에서 교차하는 부분이 없기에 대화가 종종 끊기곤 했다. 추억만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직접 만나서 식사를 해도 서로의 근황을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다였다. 내 이야기는 늘 같았다. 나의 하루는 평범했고 고여있는 호수였다. 흘러넘치며 폭포수 같이 떨어지는 동력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삶이었다.


대신 같은 처지에 있는 은퇴자와는 자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일상이 비슷하고 관심사나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도 비슷했다. 처음엔 직장에 나가던 때처럼 습관이 들어 일찍 일어나 하루를 길게 사용했는데 점점 기상 시간이 느려지고 여유가 생겼다. 급한 일이 없고 하루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쌓여있지도 않았다. 시간은 남아돌았고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삶이 지루해지고 때로 지리멸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음에 외로움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나는 삶의 패턴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집에 있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직장 다닐 때는 느끼지 못했던 자연의 변화를 관찰했다. 햇살이 나무 사이로 어른거리는 숲길을 걸으며 양쪽으로 피어난 자잘한 꽃 무더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아름다운 길을 천천히 걷기도 했다. 파란 수국과 붉은 수국이 환하게 웃음 짓는 꽃밭을 바라보기도 하고 노을이 아름다운 산기슭과 하늘을 바라보며 걸었다. 주변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길과 숲과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다. 나무에서 풍기는 푸르른 향을 맡으며 거칠거칠한 표면을 쓰다듬기도 하고 작은 꽃이 온 힘을 다해 얼굴을 내미는 놀라운 모습에 감탄하다 시간이 흘렀다.


나이가 들며 고독력을 길러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쓸쓸해 하거나 외로움을 느끼기 마련인데 인생은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한다는 명제 앞에 서면 나의 고독은 인간의 기본적 조건일 뿐이다. 은퇴한 친구들은 운동하거나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시간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며 의미 있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이가 들며 점점 동네 친구가 필요하다. 일상의 작은 것들을 나누며 소통할 수 있는 동네 친구.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오가며 인사를 나누는 이웃은 있어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만들지 못했다. 마음을 터놓은 동료는 멀리 있으니 전화통화로 외로움을 달래본다.


은퇴 후, 아직 적응되기 전엔 직장에 있을 때의 시간표가 나를 지배했지만, 점차 그 시간표는 현재에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새로운 시간표를 짜고 나의 하루를 재배치했다. 건강을 살피며 알뜰하게 예산에 맞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며 외로움을 날리는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갔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또 끝이 났다. 한 달이 흐르고 일 년이 지나갔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추억만 곱씹고 살기엔 남은 삶이 길다. 추억은 추억의 자리에 머물게 해야 한다. 추억이 현재를 지배하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나의 경우, 돈과 건강의 문제보다 외로움의 문제가 더 컸다. 아니 그 세 가지가 다 영향을 주지만 나는 관계 지향적인 사람이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집순이였던 나의 성향도 여기에 방점을 찍었다.


그럴수록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무조건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오히려 내가 누구인지, 남은 시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그동안 시간에 쫓기느라 돌아보지 못했던 나의 요구와 욕망을 찬찬히 돌아볼 시간이 정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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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란 쫓기듯 살아온 내 삶에 다가온 고요한 시간이다.

은퇴를 준비했더라도 어느 날 다가온 이 시간은 낯설다.

낯선 이 시간을 온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해야 한다.

나는 나를 알아가고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단 하나의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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