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권한 건강검진
은퇴 후의 생활에 관해 언급한 책에서는 한결같이 3가지를 강조했다. 그건 바로 ‘건강과 돈과 인간관계’다.
나 역시 은퇴 후 ‘건강, 돈, 관계’를 주목했다.
일단 돈이 있어야 인간적이고 존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노후의 돈 문제가 많은 책과 SNS의 내용을 장악하지 않았나 싶다. 살아보니 돈이 엄청 중요하긴 하다. 그런데 은퇴 후의 삶이 돈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몸의 건강이 뒷받침돼야 돈도 누릴 수 있는 거였다. 생각해보라, 병원에 누워 움직일 수도 없는데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은퇴 후, 아무 생각이 없던 나에게 딸이 정밀 건강검진을 권했다. 마침 행사 기간에 맞춰 나이든 부모를 위한 평소보다 조금 더 할인이 들어간 검진 패키지 프로그램이 있다고 했다. 그동안 고생한 엄마에게 건강검진을 선물하겠다며 검진 항목을 꼼꼼히 체크하고 이참에 그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뇌 MRI까지 찍어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딸이 비용을 다 내주니 좋기도 하면서 갑자기 노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검진 당일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이른 아침부터 4시간에 걸쳐 여러 항목을 검사하고 초음파와 내시경 같은 것은 바로 결과를 알려주기도 해서 큰 이상이 없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왔다.
결과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후에 나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결과지가 집으로 오기 전 의사에게 전화가 왔다. 병원에 나와 면담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내용은 뇌경색 증상이 흔적으로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뇌경색? 전혀 생각지도 않은 병명이어서 당황한 나는 바로 의사를 찾아갔다. 이전까지 했던 건강검진에서 큰 이상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에 건강에 대해 큰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뇌경색이라니.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가 나하고 연관이 있다는 것에 일단 놀랐다. 딸은 처음으로 뇌 검사를 해서 발견이 된 것 같다고 차라리 일찍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의사는 나에게 혹시 이상한 징후가 최근에 있었냐고 묻는다. 어지럼증이라든가 극심한 두통, 손과 다리의 가벼운 마비 증상 등등 이런 것에 대한 자각증상이 혹시 있었느냐고. 나는 전혀 그런 적이 없었고 굳이 하나를 들라면 이년 전에 일이 많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약간 한쪽 다리가 힘이 없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심한 게 아니었고 약간 허공을 디디는 느낌이어서 허리 협착증이 약간 있었기에 허리에 문제가 있나 하고 정형외과에 가서 허리 MRI를 찍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작고 흰 점이 두어 개 있는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 흰 점이 뇌혈관이 막힌 부분이라는 거다. 나도 모르게 뇌혈관이 막혔는데 상태가 심하지 않아 모르고 넘어갔다는 거다. 나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서 예전에 고지혈증약을 3개월 복용한 적이 있다. 약을 먹고 3개월 후 검사하니 수치가 안정적으로 변해 약을 먹지 않고 있다는 말을 의사에게 했다. 그런데 이번 피검사 결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는 거다. 의사가 정해준 날짜에 병원에 가 피검사도 다시 하고 심장 관련해서 초음파와 24시간 부착하는 장치를 달고 다시 뇌혈관 MRI를 찍었다. 이후 결과가 나와 뇌경색은 이미 지나간 흔적이고 가벼워서 약을 먹으며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약을 먹고 몇 개월 후 검사, 결과를 보고 약을 먹는,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병원 진료가 시작되었다. 일단 병원에 매이게 되니 일 년에 여러 차례 병원에 오가는 처지가 된 것이다. 친구 중에는 이전부터 혈압이나 당뇨 등으로 병원 진료를 받는 아이도 있지만, 대개가 아직은 건강한 편이어서 나는 급 우울해졌다. 거기다 골다공증도 있어서 6개월마다 주사도 맞으며 추이를 보아야만 했다.
이상한 건 내 기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어디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자 기분이 눈에 띄게 가라앉은 것이다. 중병도 아니고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데도 내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병원에 오고 가야 하는 것도 기분이 나빴고 은퇴 후 이제 좀 편하게 쉬면서 지내려고 하는데 병이 발목을 잡는 거 아닌가 속상했고 뇌경색에 대해 검색해볼수록 심각해질 수도 있는 질병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덤으로 골다공증까지 생겼다.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 식습관을 변화시켜야 한다며 병에 좋다는 식단을 보내주기도 하고 주변에서는 그래도 일찍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하는데 내 기분은 별로였다. 모든 일에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무기력해졌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
의사도 크게 신경 쓰지 말고 관리 잘하면 된다고 하는데 내가 왜 이럴까. 나는 그때 정신이 아무리 건강해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걸 체험했다.
늘 말했던 ‘정신일도 하사 불성’은 몸에 이상이 생기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어도 비교적 건강하게 직장 생활을 했기에 앞으로도 이런 상태를 오래오래 유지할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드니 몸이 정직하게 반응을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늘 ‘나는 숨쉬기 운동만 한다.’라고 말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의 몸을 방치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며 더는 이런 상태로 가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평소 걷는 것보다 앉아 있거나 차 타는 것을 즐기는 나의 몸을 바꿔야 했다. 그날부터 나는 죽기보다 싫었던 걷기를 실천했다. 친구들은 하루에 만 보를 걷고 측정하는 앱을 소개해주고 이제는 운동해야 할 때라고 응원해준다. 건강해야 연금도 오래 탈 수 있다고. 그러니 이제부터 건강 관리에 힘써야 한다고.
가족들도 나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 같이 공원 트랙을 돌아주고 하루 운동량을 채우도록 격려해주었다. 딸은 한 주에 두 번 가는 필라테스 회원권을 끊어주었다.
퇴직 후 건강검진이 나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전에는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있어야 정신도 깃들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몸이 불편하면 마음도 불편해진다는 사실을.
몸이 아프면 그에 따라 정신도 피폐해지는 법이다.
그러니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