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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가 있는 삶과 없는 삶의 차이

가계부, 내겐 애증의 대상이었다. 젊어서는 잡고 싶지만 어긋나기만 하는 애인 같았고 늘 의견이 달라 마침내는 파국으로 마무리를 하곤 했다. 몇 번이나 다시 쓰기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차이도 변화도 없어서 끝내 결별을 선택하곤 했었다.

그랬던 내가 정년을 앞두고 다시 가계부와 화해하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써도 써도 변화가 없어 내던졌던 가계부를 다시 끌어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실패했지만, 무수히 많은 사람이 써오고 그 효용성을 입증한 실체를 만나보고 싶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재테크의 출발점으로 가계부를 거론하고 있는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알뜰함의 대명사인 사람들이 가계부를 계속 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들은 성공했는데 나만 실패했다면 나의 전략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을 나만 모르고 덤빈 것은 혹시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자 가계부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지 않나. 나는 가계부에 대해 너무 무지한 상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계부 쓰는 모임을 검색해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그 모임에서 몇 개월 활동하면서 나는 그들만의 루틴과 노하우에 대해 알게 되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가계부 쓰기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고 자기 생활방식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했다. 그저 들어오고 나가는 돈의 기록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그 계획에 따라 소비하는 훈련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들어간 모임에는 유독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면서 가계부를 기반으로 삶을 계획하고 완성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기운에 휩쓸려 함부로 소비하거나 무계획이 계획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임에 들어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나는 조원들의 태도에 감동했다. 자신과 한 너무나 작은 약속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지키는 사람들. 하루하루가 모여 미래가 된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체득한 사람들. 나 스스로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의지가 가득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나는 혀를 내둘렀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거지?

왜, 저렇게 살지 못했던 걸까?

젊은 나이에 너무도 현명하게 휘둘리지 않고 한 걸음씩 보폭을 옮기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예산을 세우고 그 예산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삶이 모이고 커져서 아파트가 되고 주식 투자 종잣돈이 되고 미래를 위한 기반이 되었다.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냐와 같은 시시한 것에 매달리지 않고 내가 나의 삶을 준비하며 나아가는 모습이 가득했다.

내가 보기에 그게 진짜 삶의 모습이었다. 가계부를 쓰고 알뜰하게 소비한다고 해서 궁상스럽거나 초라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준비하는 미래가 있었다. 반대로 나는 준비된 미래가 부족한 사람이었던 거다.

흔히들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든다고 한다. 그 말은 대체로 맞는 말이다. 준비하는 자만이 계획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깟 가계부 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는 지난날의 나를 만나면 질책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루를 열심히, 쉼 없이 살아내는 사람들의 미래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지난날의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 지금이라도 제대로 가계부를 쓰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가계부를 써야겠다고 맘먹은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준비는 부족한데 퇴직은 다가오고 매월 받는 월급도 현직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 간극을 메울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결국 가계부로 돌아온 거다. 월급은 줄고 모아놓은 돈도 없다. 일단 월급 내에서 살아가야 하니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나도 근면성 측면에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날부터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계부를 썼고 6개월이 지나자 예산을 세우고 매달 결산까지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충동 구매 욕구가 생기면 나보다 어리지만 지혜로운 회원들의 소비패턴을 눈여겨보고 그 욕망을 잠재웠다. 그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었고 동료였고 조언자였다.

나는 매월 말일이 가까워지면 가계부를 펼치고 그달의 예산에 맞게 썼는지, 초과한 항목과 그 이유는 무엇인지 분석한다. 간단한 반성과 평가를 적고 결산한다. 늘 모자라 펑크가 나던 나의 가계부는 소액이라도 남는 기적이 일어난다. 놀랄 일이다. 돈이 남다니.


연금이 들어오면 20% 정도의 금액을 떼어 먼저 저축한다. 나이가 있기에 젊은 사람들처럼 50.60% 저축은 지양하고 있다. 한창 자녀교육에 열중할 나이도 아니어서 교육비가 드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저축에 열 올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나이가 되면 미래를 위한 저축보다 차라리 그 돈으로 건강을 위한 운동비에 지출하고 건강 관리에 힘쓰는 게 더 낫다. 80% 남은 돈으로 그달에 들어갈 고정지출과 변동지출 예산을 세운다. 매월 거의 같은 예산을 세우기에 한번 해놓으면 크게 시간이 들지 않는다. 다만 지출 내역은 깐깐하게 점검한다. 예산 내에서 지출하고 연필로 지출 금액을 적어놓으면 남는 금액을 알 수 있어서 소비를 줄이게 된다.

예전에는 예산이 없으니 쓰는 돈에 제한이 없었다. 그렇게 쓰다 보면 통장은 텅장이 되고 카드값을 갚느라 허덕인다. 이제 식비는 체크카드 내에서 지출하고 고정지출 항목에서 카드를 쓰면 미리 선결제 통장으로 쓴 금액을 보내놓는다. 그러면 나중에 카드값이 나갈 때도 크게 걱정이 없다.

처음 가계부를 시작할 때 모임에서는 카드값을 미리 다 정리하고 시작하는 게 좋다고 했다. 그래야 월급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고. 그런데 깔린 카드값을 다 정리하는 게 무리여서 결국 저축한 돈을 헐어서 정산했다. 갚아야 할 결제금액이 없으니 맘이 편안하고 미수금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솔직히 가계부를 쓴다고 금방 뭐가 보이진 않는다. 드라마틱하게 상황이 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 소비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 어찌 됐든 예산에서 조금이라도 남겨 결산할 수 있다는 습관이 가계부 쓰기의 최대 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에는 우리 가족이 한 달에 얼마가 필요하고 얼마를 쓰는지 잘 몰랐다. 이제는 그 내역이 머리에 환하다. 어디에서 더 아껴야 하는지도 보인다. 요즘엔 예산에서 남길 돈을 미리 비상금 통장으로 옮겨 놓는다. 예산이 눈에 띄게 줄어드니 조금 더 긴장해서 가계부를 쓴다. 그러면 월말 결산 때 잔액이 또 남는 기적이 일어난다. 물론 소액이지만 한 달을 허투루 살지 않았다는 기쁨이 몰려온다.

현직 대비 30%의 수입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금, 미리 가계부 쓰기 훈련이 없었다면 나는 엄청 힘들었을 거다. 그러면 자포자기 모드가 발동해 대책 없이 쓰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계부가 있는 지금, 나의 삶은 촘촘하다. 그 촘촘함이 미래를 위한 안전망 역할을 하는 것 같아 기쁘다. 많은 금액은 나이라도 조금씩 저축하는 습관과 예산 대비 남기는 결산 금액이 모이는 비상금 통장을 보면서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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