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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과 결산이 뭐길래

한 달 35만 원, 한 주에 7만 원의 식비로 살아가기는 빠듯했다. 예전에 한 번에 20만 원 이상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고 냉장고에 쟁여놓았던 시절은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하루에 만원의 행복을 실천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냉장고에 남아있는 재료를 가늠하며 간단하면서도 먹을 만한 식단을 짜내야 했다. 항상 정해진 예산만 쓰는 건 아니었고 어느 날은 만원이 훌쩍 넘어가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5천 원 미만으로 장을 보기도 해서 몇 개월 지나니 한 주에 푼돈이 만원 이상 모이기도 했다.

이게 되는구나. 이렇게 한 주씩 살다 보면 마지막 주는 한 달 날짜에 따라 2~3일만 남기도 한다. 그러면 2, 3일에 7만 원을 쓰니 쌀이나 휴지, 세제 등과 같은 생필품을 그때 사면 되는 구조다. 4월은 1일부터 30일까지 5주를 산다. 1-7, 8-14, 15-21, 22~28일까지 4주를 살면 5주는 29, 30일 이틀만 남는다. 그 이틀 사이에 예산 7만 원을 가지고 그동안 사지 못했던 생필품을 사니 한결 여유로웠다. 한 달을 계획할 때 미리 5 주차를 염두에 두고 필요한 생필품을 사는 재미도 가계부를 쓰는 이유가 되었다.

그동안 가계부를 가끔 썼지만, 예산과 결산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 2년 이상 쓰다 보니 우리 집의 한 달 생활비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이걸 한번 해놓고 나면 그 안에서 살면 되기에 돈의 출입에 대해 명확히 알 수가 있으니 일거양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정해진 항목에 따라 예산을 나눴다. 수입에 맞춰 예산을 나누고 저축 금액을 뺀 돈이 예산을 초과할 때는 용돈을 줄이는 방법을 썼다. 정말 빠듯하게 예산을 짜고 그 안에서 생활하려니 갑작스럽게 지출되는 부분에 대한 대비 항목도 없고 돈 자체가 없어 어찌 되었든 소비를 줄이고 꼭 필요한 것만 쓰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예산을 세우기가 어렵지 한번 세우고 나니 다른 달도 그 수준에서 결정되었고 여름, 겨울에 따른 관리비가 차이가 나는 것은 결산할 때 남은 돈을 비상금 통장으로 넘겨 충당했다. 예를 들어 겨울 난방비가 많이 나올 때의 관리비를 기준으로 하되 봄, 가을 수준의 관리비를 예산으로 잡는다. 그러면 겨울엔 좀 모자라고 여름엔 남는다. 여름에 남는 돈을 모아 겨울 난방비로 이월하는 방법을 사용해 적자가 나지 않도록 관리한다. 그러나 정해진 항목이 있고 빠듯하게 예산을 잡아서 초과할 우려는 커도 남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렇게 살아가다 보니 예산 내에서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경험하며 그동안의 나의 삶이 방만한 소비로 이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때는 꼭 필요한 곳에 썼고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활을 최대한 단순하게 생활하니 예산 안에서 해결되기 시작했다. 어쩌다 초과한 부분은, 적지만 잡아놓은 예비비 항목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 다만 전체 예산에서 여행경비나 교제비 항목이 없기에 그것은 다달이 결산 후 남는 금액을 비상금으로 돌려 그걸 모은 돈에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여행도 기분 내키는 대로 가는 게 아니라 최대한 계획을 세우고 예산이 없으면(비상금에 충분한 돈이 없으면) 가지 않는 방법을 택하면 된다. 꼭 해외로만 가야 하는 게 아니고 우리나라도 좋은 곳이 많으니 국내 쪽으로 눈을 돌리면 그 부분도 해결할 수 있었다.



매일 가계부를 쓰고 한 주 결산을 하고 점검하며 마음을 다지고 한 달을 마감하며 결산한다. 그러면 한 달에 얼마라도 남는다. 빠듯하게 예산을 잡았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그 돈에서도 푼돈 모으기가 가능해진 거다. 이걸 초창기부터 했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절약하고 모을 수 있었을까, 지금 와서 약간 후회도 들지만, 인생이란 게 그런 거다. 그동안 나는 그래도 하고 싶은 거 비교적 하면서 살았으니 이제는 크게 하고 싶은 게 없다. 꼭 가고 싶은 여행지도 없고 꼭 사야 할 물건도 없다. 나이가 드니 물욕 자체가 줄어들고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버리며 미니멀한 삶을 추구해야 할 판이다.

예전에는 가계부를 적는 게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하루를 마감하며 적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방어전이라고 생각했기에 쓰기 싫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 내게 가계부 쓰기는 일상이다. 물 흐르듯 그날의 소비를 들여다보고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한다. 그달에 필요한 소비를 하되 초과하지 않도록 항목마다 남은 예산을 연필로 적어 놓는다. 그 범위 안에서 지출하도록 말이다.


남들은 이미 다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부분을 내가 이토록 자세히 적고 감동하는 이유는 젊은 날의 내가 가계부 쓰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금전출납부처럼 입출금의 단순 기록에 그쳤던 기록이 이제 예, 결산을 거쳐 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작은 기적을 만나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산을 세웠고 그 범위 내에서 지출했는데 나의 마음가짐에 따라 돈이 남는 거다. 예산이 처음부터 없었기에 기준점을 모르고 예전의 나는 소비했던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 번에 쓰는 만원, 이만 원이 적은 돈 같지만 모이면 큰돈이 된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지난달부터는 예산 금액에서 미리 남는 금액을 예상해서 비상금 통장에 넣어 보았다. 확실히 예산 자체가 적어지니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돈이 없으면 쓰는 걸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카드를 써서 다음 달에 폭탄을 맞지 않으려면 매달 정해진 금액 안에서 지출하는 게 정석이다.

조금씩 비상금 통장에 모이는 돈을 보면서 뿌듯하다. 이건 내가 소비했으면 사라졌을 돈이기 때문이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 한결 쪼그라든 수입의 범위 내에서도 한 달 한 달을 살아가며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정년 전에 내가 정말 잘한 일이 있다면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해보지 않았던 예산을 세우고 결산을 하며 그달의 소비를 돌아보며 다짐하는 시간은 정말 소중하다. ‘해보니까 되는구나!’ 이게 나의 소감이다. 해보기 전에는 두렵고 과연 될까, 하는 의구심만 가득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고 나니 의심했던 부분이 ‘하니까 되는구나’로 바뀌었다. 실행해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에게 가계부는 노후 계획이다. 나의 노후는 내가 만들어가야 하고 나는 계획한 방법으로 충실한 노후를 이뤄나가고 싶다. 지금은 적은 푼돈이지만 이것이 조금씩 쌓이면 달라질 것으로 믿는다.


가계부, 일단 시작하자.

시작하면 새로운 결과를 만날 수 있다.

그 시작은 미약했지만 나중엔 창대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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