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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은퇴는, 안녕하십니까?

달력을 보니 은퇴한 지 만 2년이 지났다.

벌써, 라기엔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2023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휴직 기간 3년을 뺀 34년간의 업무에서 해방이 되었다.

‘해방’이라는 말이 어쩌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누구든 일이라는 무게 속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 해방감이 단순한 표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34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게 아니고 내 젊은 날을 고스란히 갈아 넣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일에서 놓여나니 즐거움보다는 불안감이 스쳤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나를 규정하고 있던 ‘직업’이나 ‘직함’이 떨어져 나간 상태의 자연인은 생각보다 너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일이 없는 나에게 인간 누구누구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 우울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퇴직 후의 우울감의 대부분이 이런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들었다.


어쩌면 이런 감정을 겪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이 은퇴 준비에 공을 들이는 것 아닐까.

언젠가는 반드시 올 시간이지만, 어느새 훌쩍 다가온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대비를 한다.

누군가는 경제력을, 누군가는 건강을, 또 다른 이는 인간관계를 은퇴 준비의 핵심으로 꼽는다.

하지만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은 드물기에, 은퇴를 앞두고 막연한 불안감이 더 커진다.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한다느니, 건강을 잃으면 돈도 소용없다느니,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가 은퇴 후 무너졌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의 불안을 더 자극한다.

나 역시 은퇴를 앞두고 평소에는 잘 보지 않던 경제 서적을 찾아 읽은 것도 이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은퇴하고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돈은 있으면 좋다. 아니, 많을수록 좋다. 돈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를 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조건일 뿐, 전부는 아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무용지물이다.

자산 관리에 능해 부동산과 상가를 여러 채 소유한 지인이 있다. 그런데 원인 모를 우울증이 그를 덮쳤다. 그의 하루는 유명하다는 병원을 순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 약을 바꿔가며 여러 병원에 다녀보지만, 차도가 없다.

돈이 많으면 뭐 하나. 그래도 치료라도 마음껏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이 왠지 쓸쓸하게 들린다.

현직에서 많은 인맥을 자랑하던 사람도 은퇴하고 나면 대부분 관계가 끊어진다.

그중 몇몇, 진심 어린 관계만이 남는다.


정작 은퇴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의 하루를 잘 살아내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기 위한 시간 관리가 은퇴의 성패를 가른다. 퇴직 전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현실에 안착하지 못한다거나 앞에 놓인 많은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일이 많다고 본다.

나 역시 은퇴 초기에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묻는 데 시간을 보냈다.

결국, 은퇴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가 조장하는 불안감을 넘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요즘은 은퇴한 사람들이 인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동안 일하느라 너무 바빠서 정작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앞으로 계속하고 싶은지에 대해 잊고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꿈을 접고 살았던 사람들이 은퇴를 계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책과 그림을 맘껏 즐기기 위해 도서관과 박물관을 순례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공원을 걸으며 하늘의 색감을 즐기고 햇살의 세례를 받는 일이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누구 눈치 볼 것도 없고, 남의 이목에서 자유로운 삶, 그동안 미뤄두었던 내면과의 진지한 만남을 가지는 일이야말로 은퇴가 주는 이점이며 축복이다.


나는 하루를 나를 위해 설계하기 시작한다.

나만의 은퇴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공책에 적어놓고 하루하루 그것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거기엔 거창한 목표나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 만 보 걷기.

수영강습 빠지지 않기

일주일에 책 2권 읽고 서평 쓰기

글쓰기 모임을 통해 나의 내면 성장하기

하루에 영어 표현 5개 외우기

매일 감사일기 쓰기

주변 친구들과 다정한 대화 나누기

가족과 상냥하게 인사하고 좋은 말 하기

그렇게 만든 작은 버킷리스트는 내가 다시 나를 발견하는 지도처럼 느껴졌다.

이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리스트가 아니라, 매일을 잘 살아내기 위한 나와의 약속이기에.

이런 버킷리스트를 적어두고 매일 나의 하루를 돌아본다.

나는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는가, 하고.


은퇴자의 하루는 단순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하려다 보면 자칫 과로로 병을 얻을 수 있다. 젊은 시절의 체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주 휴식을 취하고 무리하지 않으며 조금씩 꾸준히 하는 것이 제일 좋다.

나 역시 은퇴 전에는 운동이라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 만 보 걷기가 습관이 되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걷기를 지속한 지 어느덧 1년.

휴대폰의 앱이 그 사실을 알려줄 때, 조용한 성취감이 찾아왔다.

그 성취감이 내 삶의 활력이 되었다.

은퇴 전엔 솔직히 은퇴 후의 생활이 가늠되지 않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작은 나만의 버킷리스트가 있고, 구체적인 할 일이 있으며, 그것을 꾸준히 하다 보면 하루는 금세 지나간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작은 만족감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은퇴 이후의 삶을 지켜주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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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 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신 자신이라고.

세상이 말하는 성공보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자기만의 할 일을 찾고 내면을 다지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준비해나간다면, 평안한 은퇴 생활이 이어질 거라 믿는다.

당신의 은퇴도 부디 안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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