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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은퇴는 아직도 진행 중

이제 이 연재의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쓰다 보면,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목소리를 따라가게 될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은퇴에 대해 아무리 써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쯤에서 멈춰야, 그 공백 안에서 스스로 다시 묻고 또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엔 단순했다.

은퇴를 막 맞이한 나의 감정과 일상의 흔들림을, 있는 그대로 나누고 싶었다. 은퇴를 맞이하는 초보자로서 어떻게 준비하고 실행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하지만 문장을 거듭할수록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내가 또 하나의 ‘은퇴 담론’을 쌓고 있는 건 아닐까.

시중에 떠도는 은퇴 관련 책과 칼럼, 기사 속 불안과 걱정, 대비책에 그저 나의 걱정을 하나 더 얹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러면서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계속 이어간 원동력은 은퇴가 한 인간의 삶에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은퇴는 내게 한 인간으로서 처음 마주한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시간을 설계해야 하는 하루.

오로지 내 생각과 의지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자유로운 삶.

끝없는 망망대해가 내 앞에 펼쳐진 느낌이었다. 나는 그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내가 설계할 수 있는 그 자유는 생각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여전히 나는 공포에 휩싸였고, 내가 느낀 불안을 숫자로만 계산했다.

내 앞의 삶의 숫자인 연금, 병원비, 간병비….

아무리 대비한다 해도,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이 은퇴 준비의 요점이었다는 점을 은퇴 이후에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우리 삶에서 준비라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가. 그러나 긴 항해에서 준비 없는 삶은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

의미와 무모함으로 가득한 불안의 배를 타고 방향을 조절해 가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탈한 하루’를 바라는 기도가 아닐까.

요즈음 범람하는 은퇴 이야기는 이 불안을 풀기 위한 방정식이 아닐까 싶다.


문득 내가 정말 은퇴한 게 맞는가, 자신에게 묻게 된다.

일에서 놓여났지만, 살아가야 할 과제는 계속 이어지고, 나는 여전히 사회의 일원이다. 나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움직여야 하고 초고령 사회에 건강한 노년의 삶을 지키기 위해 몸을 최대한 가동해야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 하나는 분명히 알게 됐다.

은퇴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완성형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불확실함 속에서조차, 나를 다시 정의하고, 새롭게 살아갈 기회가 있다는 것. 그 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반드시 나 자신이 찾고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 글에서 은퇴의 방향 추 3개를 경제적 독립, 건강, 인간관계의 재설정으로 잡았다. 일단, 이 3개의 항목은 은퇴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방향으로 자리매김한다.

3개 중 어느 하나의 방향 추가 미끄러져도 삶은 불완전하게 진행될 수 있다. 과도한 불안처럼 과도한 낙관도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변수는 인생의 불확실성이다.

나도 은퇴 후에 어느 정도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어머니의 입원과 수술, 간병, 재활 치료 등으로 목돈이 들어갔다. 게다가 어머니는 그 나이대의 다른 분들처럼 보험이 없으셨다. 내가 실비보험에 가입했던 2009년에 어머니의 실비도 같이 가입하려고 했는데 당시 암을 앓았던 어머니의 완치 여부가 제출 서류에 포함되어 있었다. 병원에 가서 또 검사하고 의사를 만나고 자료를 떼고 하는 게 번거로워서 그때 가입을 하지 않은 게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그때 조금 귀찮더라도 그 과정을 거쳤더라면 앉아서 큰돈이 펑펑 나가는 걸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었겠다.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 지점에는 부모의 나이가 많아 병원에 가야 할 일이 많아진다. 낙상과 같은 갑작스러운 사고도 자주 일어나고 치매나 관련 질병도 발생하는 시기이기에 우리의 은퇴와 부모의 질병은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노노케어’라고 나이 든 자식이 나이가 더 많은 부모를 돌봐야 하는 시대가 성큼 다가온 마당에 나의 노후 자금에는 부모의 병원비도 합산되어야만 한다.


거기다 자신의 건강도 돌봐야 한다. 나의 경우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걷지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조금이라도 다리 근육을 만들기 위해 워커를 잡고 걷는 도수치료를 일주일에 2번 병행했는데 30분에 6만 원이었고 보험처리도 되지 않았다. 매주 두 번씩 정기적으로 가서 걷기를 하면서 시간이 짧아 얼마 걷지 못해도 걷기 연습을 하는데 돈이 드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나도 매일 걷기를 실천하게 되었다. 걷기가 무용지물이라 생각했었던 나에게 걷는 것도 돈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운동에 새롭게 눈뜨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은퇴는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의 다른 이름이었고 끝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길고 긴 여정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돌이켜보고 이해하는 시간과 만날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의 시작이었고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지는 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까.

당신이 스스로를 발견하며 기뻐할 일은 무엇입니까.

은퇴는 마침표가 아니다. 그것은 물음표이며 새로운 길이 이어지듯 새로운 질문으로 안내하는 항해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은퇴 이후의 삶을, 반드시 의미 있어야 한다고 다그치지 않으려 한다.

그저 무탈하게, 그리고 가끔은 기쁘게. 내 삶의 중심을 조금씩 다시 세우며 살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도, 은퇴를 앞둔 분, 이미 겪은 분, 혹은 멀게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삶의 어느 시점에 있든, 우리는 각자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그 항해에 이 글이 작은 등불 하나가 되었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은퇴 중이다.

그 말은, 내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동안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은퇴라는 주제를 핑계 삼아, 저의 삶을 돌아보고, 흔들림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나눌 수 있어 참 뜻깊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지금 비슷한 물살 위에 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여정이 덜 고단하길, 가끔은 고요하길 바라며—

그리고 우리 모두의 하루가 무탈하기를.

아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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