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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 또는 예술가 Sep 30. 2024

내가 만난 선생님

중학교 일학년 시절이었을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은 유난히 총기가 넘쳐흐르던 젊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사실 초등학교에서 막 올라와 천방지축 뛰노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45분 동안 수업을 진행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하지만 국어 시간엔 달랐다. 아이들이 모두 선생님을 바라보고 선생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주술처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과 같이하는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지루하지 않았다. 작은 키에 단단하고 야무진 입매를 지닌 선생님은 그야말로 입담이 좋아 어린 우리들의 혼을 쏙 빼놓는 적이 많았고 그날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교과서에 '호기심'이라는 다소 어려운 말이 나왔다. 호기심이라고? 그게 뭐지?

알 듯 말 듯 한 단어의 뜻을 파악하느라 미간을 좁히고 있을 때 선생님은 그 말에 대한 설명 대신 느닷없이 아버지의 선물 얘기를 꺼내셨다.


아버지가 생일선물을 하루 전날 사 오셨다. 생일은 내일이고 지금은 밤이라 미리 풀어볼 수도 없다. 그런데 선물이 무언지 궁금해서 나는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생일날 아침이 되었고 드디어 선물을 풀어보게 되었는데 마침내 상자를 여는 순간,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거기까지 하시고 말을 멈추셨지.  

우리는 모두 선생님의 눈과 입만 바라보았다.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그 안에 있는 선물이 무엇이냐고요. 속이 바작바작 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선생님의 입만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그때 말씀하셨지. 바로 지금 너희들이 느끼는 ‘무엇일까?’ 하는 궁금한 감정이 '호기심'이라고.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의 그 방법이 퍽 좋아 보였고 그래서인지 그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이란 감정을 말로 풀어 설명하지 않고 실제 사례를 들어 실감 나게 알게 해준 그 시간을 나는 오래오래 기억했다. 선생님은 우리가 ‘호기심’이란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기다려 주셨다. 선생님의 방법이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 건 내가 교실에서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어휘를 문자 그대로 설명하는 방법은 오히려 쉬웠다. 그것을 선생님처럼 실제 사례에 적용하여 알기 쉽게 가르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점차 알게 되었다. 나는 자주 나의 수업 방법을 고민하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가르치고 있는지 점검했다. 나의 언어가 아니라 아이들의 언어로, 내 감성이 아니라 아이들의 감성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마음먹었으나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교실 수업에서 교사의 언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아이들의 언어나 반응은 미미했다. 내용을 더 많이 가르치기 위해 나 혼자 떠들었고 아이들이 마음을 표현할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의 말과 아이들의 말이 대립하는 교실은 가끔 시끄러웠으나 결국 나의 승리로 대부분 끝났다. 아이들이 자신의 말로 표현하고 이해하는 순간까지 기다리기가 힘든 시간이었다.  


   

그 후 인터넷이 연결되고 동창을 찾는 사이트가 생겨나면서 나는 문득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우리를 가르치셨으며 우리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그해에 결혼하셨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그해 봄, 정말 우연히 거리에서 한번 뵌 게 끝이었으니 정말 많은 세월이 흘렀다. 지금까지 학교에 계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교육청에 들어가 학교를 검색하고 선생님의 성함을 써넣어 보았다. 용산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했다. 당장 그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진을 보니 젊으셨을 때의 모습이 여전했다. 개인 홈페이지에서 학생들이 부르는 선생님의 애칭이 '호호 아줌마'였다. 오호 어쩌면…. 선생님의 이미지와 딱 맞는 별명이 아닌가.      

게시판에 짧게 인사를 남겼다.

기억하실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는데.

다음날 내 메일로 선생님이 소식을 주셨다. 오래전 한 어린아이가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면

믿으시겠어요? 오랜 세월을 건너뛰고 만난 선생님. 그 당시 정년을 앞두고 계셨다. 그리고 또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는 내가 선생님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훨씬 적극적이고 개성적이며 그리고 자기표현이 늘었다. 좋은 현상이다. 되바라진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순수한 나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나의 선생님을 떠올린다.      

내가 진로를 결정할 때 은연중에 영향을 끼쳤을 선생님. 그분들의 말 한마디에 힘을 얻고 희망찬 미래를 기약했던 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반면에 매몰찬 언어로 아이의 꿈을 가로막고 시작부터 출구를 봉쇄하는 선생님도 더러 계셨다. 당시에 그런 선생님을 만나면 억울해서 씩씩대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런 선생님은 아예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학생들의 기억에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선생님. 오랜 시간 학교에 있었으면서 누군가에게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그는 과연 선생님으로 살아간 것일까. 선생님이었던 적이 있기는 할까?

교과 내용을 가르치고 생활지도를 담당한다고 모두 선생님일까?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어떤 사람인 걸까. 나 역시 바람직한 선생님의 모습을 내가 만난 선생님들 속에서 답을 찾는다. 오래 학교에 다니고 졸업 후에 또 학교에 남아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와 함께 살아왔다. 그런데도 선생님이 누구인가에 대해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혹시라도 저 중에 나로 인해 영향받는 아이들이 있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야 하는가. 

아니지, 나는 어떤 선생님으로 남고 싶은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주 선생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했다. 선생님은 과연 어떤 사람이어야겠느냐고. 학교에서 생활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선생님은 이런 사람이다, 이래야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선생님이란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사람이다. 마음을 열지 않고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해 꽃을 피우기 힘든 아이들에게 기꺼이 다가서는 사람. 서둘지 않고 천천히 상대가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려 주는 사람 말이다. 다가서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여는 사람이어야 한다, 교사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아이들이 마음을 내비치는 법이다. 그렇게 하고도 완전한 소통이 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기다림의 시간이 부족하면 아이를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한 인간을 바라보는데 과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저 헐떡이며 그들과 호흡을 맞추고자 달려왔을 뿐이다. 가능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자고 다짐하지만, 어느새 그 높이보다 훌쩍 멀어진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미안함만 가득하다. 

조금은 더 따뜻하고 조금은 더 부드럽게 애정을 가지고 다가서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냥 선생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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