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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 또는 예술가 Oct 21. 2024

선생님과 선생놈

스승의 날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학교에 가기 싫었다. 오늘 하루가 어찌 흘러갈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마음의 거부는 위경련 비슷한 증상으로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스승의 날 질병 지각이나 결석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남은 기간이 얼마나 괴로울지 뻔했다.     

며칠 전부터 담임은 아이들에게 은근한 압력을 내비쳤다.

“이번 스승의 날에 샘 제자들이 학교에 오기로 했어. 15년 전에 가르쳤던 애들인데 아직도 스승의 날마다 오지 말라고 해도 또 온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담임의 입꼬리는 벌써 실룩이고 있었다. 하기야 결혼도 아직 하지 않고 본인 말로는 오로지 교육에만 평생을 매달려 왔다는데 애틋한 제자 몇 명 없어서야 그게 말이 되겠냐만, 평소 행실로 보아 그런 제자가 있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다.

담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반장 영미는 담임 말이 떨어지자 바로 학급 회의를 소집했다.

“이번 스승의 날에 우리 담임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드리고 싶은데 의견 있는 사람 말해 볼래?”

“님, 요즘 김영란법이다 뭐다 해서 그런 거 못 하게 돼 있잖아.”

“지금부터 회의니까 요를 붙여서 말해 주세요. 다른 의견은요?”

“그래도 다른 반하고 비교될 수 있으니 섭섭하시지 않게 해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솔직히 담임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요? 매일 자기 자랑만 하고 짜증만 내는데. 선물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이들은 곧 두 패로 갈렸다. 평소 담임의 알뜰한 챙김을 받는 그룹과 아닌 애들의 의견이 달라 각자 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희경은 학부모 총회일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엄마는 가게를 누구에게 맡기기가 어려웠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맞는 회의라 선생님 얼굴도 볼 겸 온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두 자매를 기르는 엄마는 장사로 늘 고단했다. 그날 학교에 온 엄마는 가게서 일하다가 바로 나온 차림이었으나 다른 엄마들은 달랐다. 모두 탤런트들이 드는 가방을 들고 완벽한 메이크업에 화려한 옷으로 휘감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날 청소 당번이었고 까탈스러운 담임의 주문이 많아 청소가 늦게 끝났다. 교실을 나올 무렵 들이닥친 몇 명의 엄마들은 광고 속에서 보는 사람들 같았다. 곁을 지나갈 때 향기 좋은 화장품 냄새가 났다. 담임은 연신 두 손을 모았다가 비비면서 온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럴 때의 담임은 인상이 좋아 천사같이 보이기도 한다. 희경의 엄마가 주저하며 교실로 들어서자 싸늘하게 돌변하며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담임을, 희경은 보았다.

담임이 희경에게 사사건건 토를 달고 깐깐하게 규칙을 적용하기 시작한 건 그날 이후였다.

중간고사 성적 상담하던 날도 그랬다. 하필이면 영미가 앞 순서였다. 상담 시간은 20분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희경은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어두워지는 복도에서 불 켜진 교실 속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컴퓨터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던 담임은 뭐가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영미의 등을 토닥이는 동작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영미가 나가며 희경을 향해 엄지를 치켜 들었다.

“이런 담임샘, 정말 첨이야. 감동이야 감동. 얼마나 자상한지 아니? 공부해야 할 이유가 생긴 거 같아. 낼 봐.”          

희경이 교실에 들어가자 담임은 컴퓨터를 닫았다.

“너, 대학 갈 생각은 있니?”

담임이 대뜸 던진 말에 희경은 당황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온 건 대학 진학이 일 순위 목표가 아닌가. 게다가 농담이 아닌 웃음기 없는 싸늘한 시선이다.

“이번 성적 쫌 잘 나왔다고 자만하는 건 아니지? 너만큼 하는 애는 전국에 수두룩 빽빽이야. 따로 과외나 학원 다니는 거 없니? 그럼 앞으로 학원 다니거나 과외 하는 애들에게 뒤질 건 뻔하니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겠다. 엄마 가게도 힘드시다며. 대학 학비 우습게 보면 안 돼. 아무튼 이번에 나온 성적은 난 믿지 않아. 다음 시험 때 나온 성적 보고 다시 상담하자.”     

고작 10분 남짓한 시간에 담임이 희경에게 한 말은 이게 다였다. 이번 시험에 엄마를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했던 희경은 교문을 나오며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닦지 않았다. 행여 손을 얼굴 가까이 댔다가 우는 것을 들킬까 싶어서.

미친. 저런 건 선생도 아냐.

화려한 옷차림의 엄마들 앞에서 다소곳하던 그 모습이 떠올라 희경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스승의 날이라 학교는 뭔가 어수선했다. 조회에 들어온 담임의 옷이 유난히 화사했다. 교탁에 케이크를 놓고 큼지막한 꽃다발을 가슴에 안겼을 때 애들에게 고맙다고 눈물을 짜내는 모습을 보였지만 희경은 알고 있었다, 저 모습은 가짜라는 것을.

고등학교 일 학년이면 어느 정도는 사람의 밑바닥을 알아보는 눈이 생기는 법이다. 사람들 앞에서 두 종류의 얼굴을 가진 사람을 희경은 믿지 않는다. 그는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승의 노래를 공허하게 따라 부르다 하늘을 보는 척하며 슬쩍 담임을 보았다.

기대만큼 대접받지 못해 화가 났지만, 그 화를 차마 표출할 수 없는 눈빛이 거기 있었다.


쌤~ 사진 찍어요, 하며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영미는 직접 골랐다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테두리가 은으로 된 진주 브로치였다.

영미가 달아 준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담임은 세상에 다시없는 포근한 미소를 띠며 자세를 취했다.

다 같이 치즈~     

희경은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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