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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라고, 이룬 것도 없는데?

나는 26살에 교사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해에 바로 결혼을 했고 그해 가을 학기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인 1986년 가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처음 받은 월급은 내 기억으론 38만 원이었다. 처음 돈을 벌어보니 38만 원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도 봉투 속에 들어있는 제법 묵직한 현금이(그때는 월급을 현금으로 지급했다.) 한 달 노동의 대가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는데 월급으로 한 달을 살기가 빠듯해 시간이 갈수록 쥐꼬리 월급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리 교사가 박봉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하지 않나, 이것 가지고 한 달을 살라고? 속으로 푸념을 일삼았다. 그때는 봉투에 현금으로 돈을 주던 시기였기에 수중에 있는 돈은 바로바로 써나가기 바빴다. 저축의 개념이 없었고 한 달 살기도 빠듯한 돈으로 어떻게 사냐고 불평하면서 하루하루 지나갔다.

당시 주식회사 대우에 다니던 신입사원의 월급이 60만 원 정도라고 건너서 알게 되자 물론 적은 액수지만 고정적인 월급의 소중함을 깨닫기는 했다. 그 깨달음을 오래 간직하고 갔으면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선 저축, 후 지출’의 개념이 있을 턱이 없으니 들어오는 월급은 모두 생활비로 나갔다. 남편은 아직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기에 박사과정 조교 월급으로는 본인의 책값과 용돈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돈이 모자라 친정에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통장이 펑크가 나려는 순간 때마침 나오는 상여금으로 충당하며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하루하루, 일 년 이년, 세월이 흐르며 어느새 나이를 먹고 정년을 얘기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정년이라니. 세상에. 내가?

처음에는 5년만 교사 생활을 하려고 했다. 내가 교사를 하던 초창기에는 박봉이고 업무도 고되고 하여 교사라는 직업이 크게 인기가 많지는 않았다. 이거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처우가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이들과의 생활이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다. 돈보다 보람이 있는, 이야기가 있는 하루가 더 의미 있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학교는 방학이 있지 않은가. 지금보다 방학 일수가 길었던 시절이라 방학이 주는 만족감이 그 모든 걸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런 방학을 열 번 지나고 나니 딱 5년이 지나갔다. 열 번의 방학에 5년이 훌쩍 지나가다니 이럴 수가. 나는 다시 5년만 더 학교에 있기로 했다. 그때 가서 그만둬도 늦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또다시 열 번의 방학이 지나갔고 5년이 지났으며 나는 다시 5년을 이야기하다 지금에 이르렀다.

그사이 세상은 변해 서울에 있던 학교는 경기도로 이전했고 나는 서초동에서 경기도 남부까지 다니기가 힘들어 이사를 감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돈과 멀어지는 결정이기도 했다. 우리 집은 서초동 예술의 전당 건너편에 있는 주택이었다. 아파트가 아니었기에 아이를 기르기에는 조금 불편한 상황이었다. 차로 방배동 쪽에 있는 유치원에 데려다줘야 하고 학습지 선생님들이 아파트처럼 자유롭게 오지 않는 곳이어서 아이 교육에 조금 불편함이 있었지만, 강남과 가깝고 길만 건너면 바로 예술의 전당과 국립국악원이 보이는 곳이어서 주변 환경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도에 있는 학교에 출퇴근이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도로망이 잘 뚫려있지 않아 근처에 사는 선생님 차를 얻어타는 카풀을 하기도 했고 면허를 따서 직접 차를 몰고 다니기도 했다. 하루 출퇴근 시간이 삶을 힘들게 하자 경기도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기로 하고 미련 없이 서초동을 떠났다. 그때 조금만 앞날을 내다보았으면 어땠을까. 이때의 결정이 10년이 지난 후 엄청난 격차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친구들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어 이후에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오가는 길이 그리 멀고도 고단하다는 것을, 한번 서울을 떠나면 다시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신도시 아파트로 집을 옮기자 서울에서만 살았던 나는 번화한 도시와 그 도시의 문화가 그리워 약간의 향수병을 앓았다. 집을 나서면 모든 것이 갖춰진 번화한 도시의 생활에 익숙했었는데 삭막하고 아직은 기반 생활 시설이 완비되지 않은 신도시의 삶은 만족스러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직장이 가까웠기에 그런대로 몸이 고되지 않아 살 만했다고나 할까. 학교 업무가 많아지고 애들과의 관계가 밀착될수록 나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육아와 학교생활을 하느라 내 삶은 바빴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사이 교사라는 직업은 나름 인기 직종이 되었고 1993년을 거치며 월급도 조금씩 현실적으로 변해갔다.

5년만을 외치며 언제든 때려치우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던 나는, 어느새 정년을 5년 남긴 중장년의 교사가 되어 있었다.



5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오 마이 갓.

현실적으로 이뤄놓은 것이 없는데 벌써 정년이라고?

내 꿈은 정년을 몇 년 남기고 명퇴를 하는 것이었는데. 벌써 정년이라니.

세월이 어느새 이렇게 빠르게 흘렀단 말인가.

26살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나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흰머리가 여기저기서 돋아나는 중년의 얼굴은 정년을 앞둔 자의 훈장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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