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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솔로숀 Sep 20. 2019

옛날 사람이라

난임의 마음(6)

나는 최근에 KBS에서 인상 깊게 본 프로그램이 없다. 결혼 전 친정 거실에서 식구들과 함께 보던 내용에서 더 흥미로워진 부분이 없다고 느낀다. But 드라마 ’ 쌈 마이웨이’는 재밌게 봤다


하지만 KBS를 ‘국민의 방송’이라고 칭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앞서 말한 비슷한 이유로 ‘전국 노래자랑’은 왜 계속하는 걸까 의문을 품었던 20대에 며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일요일 낮, 한 병실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고 있던 커튼이 은밀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 층의 모든 병실에서 하나 되어 ‘전국 노래자랑’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그동안 나만 안 봤던 것인가’ 병원 복도를 거닐며 생각에 잠겼었다.


그리고 작년 명절, KBS 뉴스의 영향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명절 전 날이었다.

시댁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에 앉았다. 시아버님과 시할머님이 뉴스를 보고 계셨는데 마침 ‘명절을 거부하는 요즘 젊은 세대’를 주제로 한 인터뷰가 나왔다.


- ‘취업은 잘했냐, 결혼은 언제 하냐,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 매번 똑같은 질문이 부담스러워요.

- 아직도 여자에게만 과중되는 명절 노동이 싫어요.


조용히 TV를 보던 가족들에게 이 뉴스 한 꼭지가 새로운 화두를 던진 것이다. 마침 싱글인 아가씨가 명절을 맞아 해외여행을 갔던 터라. 어른들이 저러니까 애들이 부담스러워서 명절에 집에 안 오는가 보다고 지난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명절 문화가 좀 달라지긴 해야 한다는 건설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사실 유튜브에 훨씬 솔직하고, 때론 심도 깊고, 더욱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는 콘텐츠들이 많다. 하지만 며느리에게는 시댁 어른들이 소비하는 채널에서 시의 적절하고 은근하게 던지는 화두가 더욱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혼 2년 차, 명절에 시댁 가족들과 함께 먹을 저녁거리를 사러 가는 중이었다. 운전은 남편이, 보조석엔 내가 탔고 뒷좌석엔 시할머니와 시아버님이 계셨다. 거리상 자주 찾아뵙지 못해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바뀐 동네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을 던지듯 시 할머님이 말씀하셨다.


- 그래, 아가야 아기 가지려고 노력은 하고 있니?


시아버님은 곧바로 애들 스트레스받아 안된다며 할머니를 저지하셨지만 할머니는 손주며느리한테 그런 것도 못 물어보냐며 되려 아버님께 핀잔을 주셨다. 곧 차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졌고 나는 간단히 ‘아기 계획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피임을 하고 있진 않고요~ 계획도 있고 실행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하하.라고 할 순 없으니까.





차례를 마치고 시할머니는 멀찍이 떨어져 서있는 나를 불러 앉히고 술을 한 잔 따라주셨다.


- 우리 아가, 이거 마시고 아들 낳아라~


그냥 좋은 기운을 받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지 생각하면서도 좀 꺼림칙한 느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곁에 계시던 작은 아버지께서 흠칫 놀라시며  ‘어머니 요즘은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코멘트를 달아주셨다. 하지만 할머니는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여한이 없다는 표정이셨다.


결혼 후 지금까지 손주 관련한 얘기는 이렇게 딱 두 번 들어봤다. 할머니께서도 참고 참으신 말씀 이리라. 노인정에서 친구분들이 얼마나 손주 자랑을 하겠나. 너무 마음에 담아둘 것 없다고 재빠르게 마음을 정돈했다.


‘시골 분이시잖아, 옛날 분이시고~ 좋은 뜻에서 하시는 말씀이겠지’ 이런 생각도 얹어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후에 할머니는 별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해마다 직접 가꾼 마트에서 맛보기 어려운 유기농 채소를 보내주시고 시댁에 가면 우리 아기 왔냐면서 누구보다 예뻐해 주시는데도 내 귀엔 점점 할머니 말씀이 잘 들리지 않는다. 마치 자동으로 음량이 줄어드는 것 같은 신비로운 경험이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자던 그 짧은 두 문장은 임신이 안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떠오를 때마다 자동 재생되곤 했다. 결과적으로 ‘옛날 분이시라 그 말이 현재의 나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모르셨을 거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말자.’라는 다짐을 내가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그 부정적인 의미와 크기를 더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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