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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솔로숀 Sep 28. 2019

생산보다 생존이 먼저다 (2)

난임의 마음 (5)

하늘에서 아기천사들을
지상에 내려보내기 전에
먼저 엄마, 아빠가 될 사람들의 삶을
미리 한번 보여준대 그래도
아기가 저 집에 내려가서 살겠다고 하면
기억을 지우고 내려오는 거래


 난임 검사 결과가 안 좋았다는 내 말에 친구가 해준 말이었다. 대화의 흐름상 ‘임신은 온전히 너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어떤, 뜻도 있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아니면 이렇게도 생각해보라고 ‘아기가 너의 삶을 보려고 아직 줄을 서있는 거라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왜 나는 왜 ‘저 집엔 안 내려갈래요’라고 말하는 아기천사의 모습이 떠올랐을까?




회사에 일거리가 많은 시기였다.


기업이 TV나 매거진에 쓸 광고비를 SNS나 유튜브같은 디지털 매체로 크게 뚝 떼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광고주인 기업은 메이저와 마이너를 구분하지 않고 이 상황을 가장 신통하게 풀어갈 만한 대행사와 계약하고 싶어 했다.


ㅇㅇ기업의 ㅁㅁ브랜드 담당자입니다.
우리가 지향해 온 바, 나아갈 목표는 이렇습니다. 브랜드 홍보를 위해 책정된 예산은 얼마입니다. 제안 작업 기간은 2주입니다.
참여의사를 내일까지 밝혀주세요.
고맙습니다


회사로도 개인으로도 좋은 경력이 될 만한 브랜드의 ‘제안 요청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년에 진행한 홍보 프로젝트로 SNS상을 수상던 것이 컸다.


내가 일하는 광고 홍보 분야에서 광고주인 기업의 제안 요청은 회사의 생계와 직결된다. 20명 남짓의 작은 디지털 홍보 회사에서는 광고주를 ’ 쌀 주는 사람’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제안의 기회는 소중했지만, 회사에 제안 인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회사의 모든 구성원은 ‘십시일반’으로, 매니저는 하루 10시간 이상의 공수를 들여 2주의 기간 동안 ‘브랜드 전략서’를 한 권씩 써내야 한다. 이렇게 공부했음 서울대 갔다는 말만큼 의미 없는 말인걸 알지만 이렇게 논문을 썼으면 나는 벌써 박사가 되고도 남았다.


기업이 제시하는 브랜드와 예산이 커질수록 ‘이 프로젝트 진짜 우리가 따내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기획안을 쓰고 있었다. 비딩에서 탈락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대표님의 날카로운 컨펌이었으므로. 남은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기획 내용은 어마어마하게 뒤집혔다.


나중엔 마치 요즘 먹히는 가요의 흥행 패턴을 모두 습득해버린 작곡가처럼, 브랜드 분석을 하고 나면 클라이언트의 귀에 때려박을 만한 멜로디부터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 복제와 같았지만 그렇게 한 해 정도는 장사가 잘 됐다. 전국구 과거시험급으로 대행사를 불러 모은 어느 대기업의 브랜드 OT자리에서도 쫄지 않았던 비결은 이랬다.


1. 잘 읽히게 쓸 것.

2. 실무자의 신경 줄과 체력, 그리고 시간을 바탕으로 다른 대행사는 엄두가 안 날 정도의 무리함을 담을 것

3. 빅맥 런치 같은 가성비로 수제버거를 만들 수도 있다는 ‘되게 하는 사람’ 마인드를 갖출 것


기획자의 입장에서 실행할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프로젝트들이 우리 팀에 맡겨졌고, 고전하며 현실로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생계’를 위한 도전은 끝이 안나는 거다. 회사가 이제 쌀을 채울게 아니라 쌀독을 들여놔야 했던 때에도 말이다.


그래도 한동안은 ‘성취뽕’ 이란 게 있어서 1년 넘게 그런 작업을 반복했다. 그 사이 건강 체질이던 20대 실무자들까지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했고, 돌아가며 응급실 이벤트를 치렀다. 새벽 두 시 응급실에 간 대리와 메신저로 나머지 아이디어 회의를 하기도 했다. 우리 미친 것 같다면서.


나 역시 현대인의 주요 질병인 거북목을 가지고 있었는데 곧 일자목으로 진화했다. 다음 해에는 목디스크, 다음 해에는 허리디스크까지 얻게 되었다. 반대로 휘어가는 척추뼈를 따라 등근육도 엉망이 되었다.


며칠 째 허리를 펴지 못하고 걷던 어느 날 도저히 안 되겠어서 조퇴를 했다. 병원에서 목부터 허리까지

10방 정도의 신경주사를 맞았다. 의사는 치료 후 적어도 3시간 이상은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3시간 이후면 제안서 제출이다.


다리가 저려올 때만 간간히 누웠다 일어나며 마무리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의사결정자에게 들어가기 전에 먼저 자료를 받아보았던 기업의 실무 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 팀장님! 내용 알차고 잘 읽혀요. 근데 페이지별로 더 넘기고 싶은 마음이 들게 ‘더 재밌게’ 써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드렸습니다~


큰 기업에서 우리같은 작은 회사에 보내는 신뢰는 고마운 것이다. 작은 회사는 담보할만한게 별로 없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더 재밌게!’ 라니.. 만화책을 사보던지 영화관에 가시라고 할 뻔했다.


- 아, 재밌게요! 그런데 담당님 지금 제출 30분 전입니다. 어떻게 수정하면 가능한 미션일지 힌트라도??


어이가 없었지만 또 최대한 맞춰서 어찌어찌 파일을 전송했다. 그때 그 담당자의 거대한 맑음이 나의 일이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인지하게 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그곳은 참 고마운 회사에 속한다. 개중에는 대행사로부터 여러 기획안을 수집하여 매체를 스터디하고 계약은 기존 방향으로 진행하는 곳도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국민 청원 게시판에 광고 대행사의   ‘Rejection fee’*에 대한 안건이 올라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 리젝션 피(Rejection Fee, 탈락 보상금)는 광고나 홍보 업무를 맡길 외부 전문업체 선정 입찰(bidding)에서 탈락하는 업체에 주는 일정 액수의 보상금이다. 고객사가 요청한 경쟁에 참가한 만큼, 준비 과정에서 들어간 아이디어나 제작비, 제안서 작성에 쓰인 인건비 등을 지불하는 것이다. (출처:더피알)




임신이 잘 되는 체질을 만들어보기 위해 한의원에 체질개선 약을 지으러 갔다. 약도 약이지만 운동량을 좀 늘려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 네, 선생님 그래도 주 2~3회는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걸요.

- 그럼, 땀이 뻘뻘 나는 정도로 주 4회는 해보시는 걸 추천해요.


퇴근 시간이면 가능한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남편은 피트니스 센터에서 만났다. 근육을 풀어주고 강화하기도 하는 치료 목적의 퍼스널 트레이닝을 했고 끝나면 한 시간씩 스피닝을 탔다.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를 타지 않고 서너 정거장 되는 거리를 걸어 집에 돌아왔다. 회사에서 못한 일은 침대 위에 노트북을 가지고 올라가서 했다. 1분도 허투루 쓰지 않는 우리의 삶이 참 성실하고 건강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젊고 건강한 우리에게
왜 아기가 생기지 않을까?


적어도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건강한’이라는 잘못된 전제가 있었던 거다. 가까스로 퇴근하고 귀가한 남편의 얼굴이 가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알아볼 일이었다. 남편이 과로로 쓰러져 집중 치료실에 있던 며칠 동안 그 하얀 얼굴이 그렇게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우리는 30대의 젊음을 마치 마르지 않는 샘 인양 선불로 퍼먹고 있었다. 젊은 기운에 가까스로 살아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남편의 ‘미니 뇌졸중’과 나의 디스크 질환은 6개월 간격을 두고 일어났다. 정신이 버쩍 들었다. 다른 의미의 체질개선이 필요한 시기였다.


다음 달부터 피트니스 센터의 피티 연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부부 상담을 등록했다. 부부 상담의 목적은 난임이 아니었다. 그걸로 우리 사이가 나빠질 이유는 없었으므로. 다만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땅이 단 시간에 우리를 집어삼킬 것처럼 흔들렸다. 그런 긴장감은 ‘둘이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을까?’ 같은 위기의식, 공포 같은 감정을 만들어냈다.


- 여보, 나는 올해가 너무 무서웠어. 그러니까 우리 둘이 먼저 살아남을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아.


*난임에 대해 알아보다가 요즘 부부들은 임신이 어려울 정도로 일상생활에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읽었다. 거기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생산보다 생존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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