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의 마음 (7)
돌아보면 첫 번째 인공 수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다행이었다. 그 시기에 운이 따라서 아이를 가졌더라도 행복한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릴 수 없었을 것 같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판이 크게 흔들리고 있던 때였다.
우리의 특별한 경험은 일종의 면죄부가 되었다.
남편은 꽤 오래 휴직이 가능했지만, 그 기간을 다 채우기 전에 퇴사를 결정했고, 나도 그 해에 회사 일을 정리했다.
내가 돈으로 바꾸려던 건 창의성과 노동력이었는데 왠지 체력과 수명까지 끼워 팔지 않으면 일이 성립이 안됐다. 그것까지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걸 내놓지 않고는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았다.
10년 만기가 얼마 남지 않은 남편의 연금 보험을 깨고 거기에 내 적금까지 정리하니 남은 이자가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대출금의 일부를 상환할 수 있었다. 퇴직금과 진단 보험금으로 앞으로 1년 치의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 외 예상되는 손해는 감수하기로 했다. 그 선택에 우리는 전에 없이 단호했다.
모든 결심을 마치고 양가 부모님께 우리의 계획을 전했을 때 네 분은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남의 아들 딸들은 한참 종잣돈을 모으며 가족계획을 세울 때, 우리 애들은 부부가 한꺼번에 일을 그만두고 잘 살고 있는 건지 다시 고민을 해보겠다니, 이건 용기가 있는 건지 무모한 건지 판단이 안 선다는 것이었다. 끝내는 진한 염려가 섞인 응원을 보내주셨지만.
- 다들 그래도 어떻게 버티고들 사는데, 그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희 인생이다. 우리가 뭐라고 할 순 없다. 그저 기도 하마.
이젠 부부동반 모임에 가도 나의 임신 계획을 묻지 않는다. 그저 얼굴 좋아 보인다 정도의 인사말을 건넬 뿐이다. 저출산 시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부분 3인 또는 4인 가족을 이룬 친구들은 모두 무릎 위에 자신들을 닮은 아이를 하나씩 안고 있다. 아기 식사를 챙기느라 제 입으로는 밥 한술 넘기기도 어렵지만 그걸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진 않다. 그동안 남편과 내가 앉은 테이블의 접시만 계속해서 비워졌다. 좀 머쓱해서 먹는 속도를 낮춰본다.
출산 후 ‘100일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는 지인이 말했다. ‘딩크족’으로 사는 것도 꽤 괜찮은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동의한다. 부부가 그 삶을 선택했다면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 없는 부부’로 살기로 정하지 않았다. ‘당분간’이었다. 앞으로 1년 정도는 아기를 가지려고 애쓰지 말자는 그런 합의 정도만 있었다.
-자꾸 뭔가 안 되는 기분에서 벗어나자.
-임신 테스트기는 굳이 사용하지 말자.
-어디 아프면 생리 전이라도 약을 먹을 수 있다.
-모든 행동에 임신/괜찮은가요?라는 검색을 해볼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명절에 친척네 부부가 돌쟁이 아이들을 데려오면 거실에서 나는 무슨 표정으로 앉아있을까 따위 고민하지 말자.
그렇게 지내보자는 것이었다.
평일 낮, 남편과 김밥 한 줄 씩을 들고 서울 둘레길 산책을 했다. 아침에는 수영을 하고 저녁에는 손을 잡고 철길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매일 벌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색이 좋아졌고 따로 마사지를 받지 않아도 몸이 가벼웠다.
남편은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해서 신혼여행 때까지 일주일 이상 쉬어본 일이 없었다. 우리가 겪은 일이 무엇이든 당장에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건 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나 역시 행복했다. 뇌경색 후유증을 피할 수 없었다면 제대로 앉는 것도 서는 것도 힘들어했을 남편이었다. 이 사람과 눈을 맞출 수 있고, 손을 잡을 수 있고,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게 고마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