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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솔로숀 Sep 19. 2019

생산보다 생존이 먼저다 (1)

난임의 마음(4)

시술을 진행하기 전에 우선 배란일에 맞춰 자연 임신을 시도했다. 나팔관 막힘이 난임의 원인이었던 경우 나팔관 조영술을 하고 나서 자연 임신이 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 사이 남편도 정자 운동성과 정상 정자수 등을 측정하는 검사를 했다. 첫 번째 결과는 이상할 정도로 정자수가 적고 운동성도 좋지 않았다. 병원에서 재검사를 해보자고 했고 두 번째 결과에서는 주요 항목들이 정상 범위 내로 들어왔다. 나의 나팔관은 잘 뚫려 있었지만 그 달에 임신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인공 수정 시술에 동의하고 생리일에 맞춰서 병원을 방문해 배란 주사를 맞았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아침 일찍 병원에 도착해 첫 번째 주사를 맞고 주사실 간호사에게 배 주사 놓는 방법을 배웠다. 집에서 맞아야 하는 분량의 주사액은 냉동 보관이 필요해 아이스백에 챙겨줬다.

 

 점심시간 전에 회사로 복귀해서 탕비실 냉장고 깊숙이 주사기를 담은 봉투를 밀어 넣었다. 마감 날이라 오후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 잘 다녀왔냐고 물을 줄 알았더니 지금 병원에 입원을 한다고 했다.




남편은 두 달 넘게 이어지는 제품 관련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각국에 퍼진 공장을 돌아보느라 빡빡한 출장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고 한국에 돌아오면 긴급하게 이어지는 회의를 진행했다.


3일 전, 퇴근 무렵 남편에게 오는 전화의 용건은 주로 ‘저녁 뭐 먹을까’ 다. ‘뭘 해 먹자’ 거나 ‘뭘 사가냐’ 거나.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의 회사 동료였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했다.


- 회의 중간쯤부터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게 이상해서 불러봤더니 못 일어나더라고요. 옷은 땀에 다 젖어있고 119 불러서 지금 응급실에 가는 중이에요

- 네.. 그런데 남편은 통화가 어려운가요?

- 아.. 의식은 있어요. 아내분 전화번호를 찾아줘서 연락드렸어요.


의식은 있다. 다행이면서도 엄청 불안한 말이었다.


 남편이 도착했다는 대학 병원 정문에서 응급실 방향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숨이 가빠온다. 응급센터가 보이자 응급실 문 앞 베드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그 옆에는 초조한 표정으로 남편의 가방과 재킷을 들고 있는 동료가 있었다. 멀찍이 다른 한 명의 동료가 남편이 내린 구급차 앞에서 구급대원과 얘기 중이다.


동료들은 남편이 깨어나는 걸 보고 가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응급실에는 보호자 한 명밖에 들어갈 수 없다.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들을 정중히 보내고, 짐을 받아 내 어깨에 짊어졌다. 별 것도 안 들었을 가방이 무겁다.


 남편은 나를 올려다볼 기운도 없이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응급실에 들어가 이것저것 검사를 하면서 의사의 질문에 겨우 대답했다. 30분쯤 지나서였을까. CT실에 들어갈 때쯤에는 나에게 말을 걸 정도로 나아지기 시작했다. 응급처치가 잘 됐나 보다 생각했다. 이후에 두통과 어지럼증을 동반하는 기타 질병에 대한 기초적인 검사를 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고, 3일 후 신경과 외래를 통해 CT 검사 결과를 들으면 된다고 했다.




외래 진료를 가서 들은 병명은 ‘뇌혈관 박리’였다.  

다만 계속해서 두통이 있으니 입원해서 지켜봐야 했다. 일반실에는 베드가 없어 집중치료실로 들어갔다. 면회시간이 따로 있지만 입원 시 개인 물품 확인이 필요해 잠깐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배란 주사를 맞은 배가 심하게 당겨 뭐라도 잡고 서있어야 할 만큼 힘들었다. 얼마 전에 응급실에 갔던 남편은 생각도 안 하고 아침부터 바지런히 배란 주사를 맞으러 간 내가 어리석게 느껴진다.


 다음 날 아침, 최종 진단이 나왔다. 뇌경색이었다. 두통이 가라앉지 않아 MRI 검사를 해보니 뇌경색이 지나갔다고 했다. 말인즉 갑자기 뇌혈관이 막히면서 뇌경색이 왔는데 몸의 방어 기제가 작동해 스스로 혈압을 높여서 혈관을 뚫었고 지금은 회복기에 있다는 것. 젊고 체력이 좋아 가능했던 일일지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발생 시기를 3일 전 응급실에 왔던 날이라고 예상하면, 지금은 뇌경색이 지나간 자리의 뇌세포들이 부어오르면서 신경을 눌러 두통이 오는 거라고. 뇌 손상이 된 부위는 앉거나 설 때 균형감각을 담당하는 곳인데, 저 두통이 지나가 봐야 후유증의 정도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 동안 남편은 눈도 뜨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두통을 견뎠다. 가까이 가서 남편을 불렀더니

서서히 손을 움직여 내 손을 꼭 잡아줬다. 후유증은 없었다. 의사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환자 사물함 위에서 남편의 스마트폰이 유난히 징징거리고 있었다. 잠시 부재중 몇 통화가 떴다가 곧 다시 전화가 울린다. 회사와 직급이 뜨는 걸로 보아 고객사 담당자였다. 남편은 어제부터 전화를 못 받았을 텐데 정말 급한 일이라면 회사로 연락해 뭘 물어보던지, 회사가 먼저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를 바꿨어야 하지 않은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편이 아파서 입원했고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 (이 정도 전화를 안 받으면)
회사로 전화를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
팀 내 다른 담당자 컨텍 포인트는 없느냐.


 그 담당자는 남편의 상태에 대해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어버버버하다 전화를 끊었다. 내가 너무 친절했다는 생각이 들어 내내 후회스럽다. 전에 밤에도 막 전화하고 그랬던 그 새끼가 너니?라고 질러버릴 것을.




난임 병원에 이번 회차 인공 수정 시술을 중단해야 할 것 같다고 전화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는지 상담원은 친절하지만 건조한 어투로 시술 중단 이유를 물었다.


- 남편이 뇌혈관 문제로 입원했어요.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비명이 들렸다.

- 쾌차하시길 빕니다. 원장님께 내용 전달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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