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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솔로숀 Sep 06. 2019

난임의 통점은 마음

난임의 마음(1)


자궁 내막증이네요


 나라에서 지원하는 자궁 경부암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염증 수치로 보아 자궁 내막증이 의심된다는 얘길 듣고 추가 검사를 했다. 검사지를 보고 산부인과의 원장은 마침 책상 위에 전시되어있던 내막증의 자궁 모형을 내 앞으로 끌어왔다.


- 내막증은 자궁 안에 있어야 할 내막 조직이 자궁 밖에 이렇게 남아있는 거예요. 평소 생리통이 심해요?

- 네, 생리통은 심한 편이에요.

- 이렇게 역류한 생리혈은 원래는 사라지는데 그렇지 않으면 난소에 남기도하고, 작은 핏덩이가 참깨를 뿌려놓은 것처럼 자궁 전반에 퍼져있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초음파로도 확인이 잘 안 돼요. 임신을 방해하는데 진단도 어렵죠. 불임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임신을 준비 중이면 불임센터로 가보세요.


 안 그래도 생소한 자궁 모형인데 거기에 다닥다닥 붙은 핏덩이들까지 보이니 마음이 심란하다. 이때 본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 난임 치료 동안 내 마음을 괴롭혔다. 그런데, 내가 지금 ‘불임’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난임 아니고 불임?


일단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 ‘불임'과 '난임'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 불임이 난임이에요.


짧은 대답이었다. 마치 '난임이나 불임이나'라는 표정이라 말문이 막혔다. '어려운 것'과 '안 되는 것'을 같은 뜻으로 쓴다는 건 이상했다. 의사에게 그 이상 설명할 의지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지만.


- 추천하는 불임센터가 있으신가요?

- 서울에는 **,**,**이 큰 병원이고 이 근처에는 **병원이 있어요. 나머지는 좀 더 알아보시고 선택하시면 됩니다.


검색창에 ‘서울 난임 병원’만 검색해도 알 수 있는 정도의 정보였지만, 어쨌든 추천받은 병원 이름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받아 적으며 진료실을 나왔다.


병원 바로 앞이 지하철역 입구였지만, 때마침 켜진 파란 신호등을 따라 집과는 상관없는 맞은 편으로 길을 건넜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를 듣자마자 짧은 설움이 터졌다.


- 어, 딸~

- 엄마, 나 자궁 내막증 있대.

근데 이게 불임의 원인이 된다네, 여기선 안되고

불임센터를 알아보래!


 엄마는 담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어느 병원으로 가는 게 좋다고 해? 어느 동네에 있대? 그런 건 좀 물어봤어?


엄마는 어머, 어떡하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후에 해야 할 일이 뭔지 상기시키듯 나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아직 울 일도 아니고 검사를 자세하게 받아보면 된다면서.


하지만 엄마도 무서웠다고 했다. 핸드폰에 ‘예쁜 우리 딸’이 뜰 때마다 또 울고 있을까봐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난임 기간을 통틀어, 그 자궁 내막증을 진단받던 날은 손에 꼽힐 정도로 괴로웠다. 놀란 마음에 더 그랬겠지만 당분간의 내 삶에 불행이라는 끄기 어려운 불이 지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즘 부부들에게 ‘그런 일’이 많다고 들었지만. 굳이 ‘난임’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기운이라도 나에게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숨을 죽였던 것 같다.


그때까지 난임은 나에게 해리포터의
 ‘볼드모트’ 같은 것이었다.




난임 병원은 크고, 넓고, 친절했다. 도대체 어떨 거라고 상상했던 건지.. 로비 사무실에서 우선 상담을 받고 자궁내막증을 전문으로 보시는 분으로 담당을 정했다.


먼저 혈액 검사를 통해 난소 나이를 알아볼 수 있는 AMH 검사를 진행했다.


환자 나이 31.7세
난소 나이 40세 (난소 수치 1.3)

 여자 나이 35세가 넘어도 노산이라는데, 내 난소는 언제 저렇게 나이를 먹고 있었던 것인가? 충격적이었다.


담당의사가 말했다.

- 거기 쓰여 있는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난소 수치는 자궁 내막증의 영향으로 보인다. 지금 나온 수치는 과배란 진행 시 정상 반응 범위 내에 있다. 검사지 내용에 너무 연연할 것 없다.’ 고 연달아 말했다. 임신 가능성을 나타낸 그래프의 선이 급격하게 바닥으로 내리 꽂혀있는데도요?


의사는 편안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40세라는 나이에 너무 꽂히지 마세요.


병원을 나가면서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될 정도의 섬세한 주의사항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나머지를 내가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볼드모트를 입에 올리지 않고 조심스러울 때, 볼드모트를 직접 만나본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된 기분이었다. 왠지 승산이 생기는 기분이다. 안심이 된다.


- 다음 검사는 나팔관 조영술입니다. 신랑 분도 비뇨기과에 오셔서 정자 검사하고 가시면 돼요. 예약은 밖에서 도와드릴 겁니다. 오늘은 배란 날짜를 드릴 테니 자연임신을 시도해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난임이라는 어려운 싸움을 앞두고 첫 번째 게임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을 정확하게 나누어 준 것 같았다. 다음 나팔관 조영술 검사 날짜를 정하고 병원 로비로 나왔다. 난임 시술을 진행하는 동안 부부 심리 상담 예약이 가능하다는 안내 책자가 보였다.

 



난임을 진단받았다고 갑자기 안 아프던 어느 장기에 통증이 생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10대 때부터 꼬박꼬박 생리를 하면서 ‘가임 여성’으로 살았는데,

앞으로는 ‘난임 여성’으로 살게 된다는 것은 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 역시 ‘임신과 출산’이란 부부의 자연스러운 생애주기로 ‘제 때’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제 때’를 벗어난다는 것 만으로 공포와 위험을 감지했을 만큼.


가령 ‘올해 결혼한 지 몇 주년이지?’로 시작하는 질문에는 ‘좋은 소식 없어?’라는 질문이 따라온다는 것에 대해 미리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저 관심과 안부인사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불편한 마음이 얼굴로 나타났고 혼자 날을 세웠다. 내 마음을 전처럼 컨트롤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당황스럽고 슬퍼졌다.


 난임 검사를 받던 즈음에 당시 임신부였던 회사 동료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 어디 임신이 쉬운가. 난 주변에 임신이 안돼서 고생하는 친구들을 여럿 봤어요. 결혼도 늦게 하잖아. 남자들도 취업하면 주로 사무실에 앉아있기만 하니까 정자 운동성이 떨어진대요. 그래서 첨부터 산전검사를 난임 병원에서 했는데 선택 잘했다는 생각 해요. 필요하면 추천해줄게요’


 주변에 먼저 결혼하고 일찍이 난임을 겪었던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고, 계획 임신이 쉽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알고 대비했다는 게 좀 부러웠다. 나는 왜 난임 센터에 찾아가는 것부터가 불편했을까. 무서운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진료실 앞에서 벌벌 떨었던 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 너도 남편도 젊고 건강한데 뭐가 문제야. 아기는 곧 찾아올 거야!


 만삭 친구의 위로가 놀랍게도 아무 힘이 되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결혼 2년 차인데 아기 계획 없냐’는 안부는 3년 차에도, 4년 차에도 묻는 사람이 있더라. 그것 말고는 딱히 나에게 알고 싶은 게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삐뚠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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