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금 Mar 28. 2021

설마 요즘 같은 시대에 착한 아이 증후군을 앓고 있니?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 중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많다. 조금 더 그것을 진하게 느끼고 싶다면 우리가 보고 자랐던 드라마를 떠올리면 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여성 상은 드라마에 극적으로 반영되었다. 소재는 다양했지만 여자 주인공은 대부분 착했다. 착한 여주는 권력을 가진 멋진 남주를 차지했다. 여자 주인공은 착하게 자라야 보상이 주어졌다. 남자주인공 또한 진중하고 선하다. 권선징악이 명확했다. 현실과 달랐음에도 우리는 착해야 성공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착함'과 그 착함을 꾸준히 이어갈 '성실'이 요구되었다.


동국대 석좌 조벽 교수님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한국에 와서 놀라운 말들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실력이 없으면 인성이라도 좋아야지'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실력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실력이 없을 때 인성을 갖춰서 실력자 옆에서 그들이 뭘 하든 참는 처세술이라고 인식되고 있다는 뜻인데 인성이 그렇게 비굴하고 비겁한 짓일까요?라고 반문하셨다. 맞다. 가끔 어떤 집단에서의 친절함이 아쉬워서 하는 행위라고 해석된다. 인성은 속에서 갖춰져서 겉으로 드러난다. 친절하게 대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면 호구가 되는 집단도 생각보다 많다.  


사실 착한 아이 증후군에 대해 기똥차게 설명하고 싶어도 이것이 어디서부터 나에게 스며들었는지 알 수 없다. 처음부터 내가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착하다의 의미가 자라면서 왜곡되었음에 틀림없다. 아무도 '착하다는 게' 뭔지 알려주지 않았고 그걸 정의한 책이나 미디어도 접할 수 없었다. 미디어에서는 그걸 희생이라고 표현했는데 가족을 위한 희생이나 타인을 위한 희생은 고결하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흘려보냈다. 그렇게 직장에서도 '희생'은 가끔 미덕이 되기도 했다.


착한 사람에 대해 정의해보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걸까?' 아니면 '마음이 약한 것?' '타인에게 맞춰주는 것?' '손해를 감수하는 것?' 그런 뉘앙스의 것들이 뒤섞인 느낌이기도 하다. 나는 나와 정반대의 타인을 만나며 내가 '착한 아이 증후군'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최대한 예의를 지키자' '럼 저 사람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주겠지'라는 믿음으로 살긴 다. 이게 타인에게는 착한 아이 증후군으로 비쳤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을 거울 삼아 나를 한번 돌아봤다. 제삼자의 눈으로 본 나는 착한 아이 증후군이 확실했다.


그랬구나. '나 욕먹기 싫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라는 깨달음과 동시에 '하지만 왜? 굳이 나쁜 사람이 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이 공존하면서 '좋게 지내려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싶었다면 '나쁜 아이 구별 법'도 함께 익혀야 하는 세상이라는 걸 나는 참 늦게도 깨달았다. 콤플렉스라는 건 그만큼 복잡한 것이 한데 섞여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거나, 과한 배려를 한다면 한 번쯤 내 과거를, 내 생각을, 내 관계들을 해부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인용 출처

유튜브 세상을 바꾸는 시간 : 642회 집단지성 시대가 요구하는 공부 | 조벽 동국대 석좌교수


사진 unsplash

이전 08화 포기한 걸까? 지켜낸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