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병은 서서 생각한다
별 일이 다 있다.
저녁에 CCTV를 살피며 5분대기조 근무를 하던 때였다. 나는 부대의 유이(唯二)한 명문대생으로 주목 아닌 주목을 받고 있었는데, 드물게도 병사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G 중위가 탁자 앞의 페트병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OO야, 페트병에 입 안 대고 물 마시면 침 들어가니?”
“잘못 들었습니다?”
사실 제대로 들었다. 듣긴 들었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물 마실 때 이렇게 입 안 대고 마시면 침이 들어가나? 너는 똑똑하니까 알 거 같아서”
“???”
순간 당황했다. 입을 안 대고 마셨는데, 당연히 침이 안 들어가지 않나? 병사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는, 젊고 유능하고 신사적인 G 중위가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하는 질문은 아닌 듯했다. 그는 정말로 궁금한 표정으로 내게 다시 한번 물었고, 나는 답했다.
“아, 저도 문과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안 들어갈 것 같습니다.”
“물, 침 둘 다 분자로 이루어져 있고, 중력 때문에 밑으로만 내려갈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구나”
G 중위는 뭔가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약간 허당 같은 인간미까지 갖춘 사람인 걸까. 아니,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지만, 실제로 침이 안 들어가는 게 맞긴 할까. 입 가까이 페트병을 갖다 대고 입을 여는 순간 침이 튈 수도 있고, 알 수 없는 전기적 작용으로 중력을 거슬러 침이 들어갈 수도 있는 걸까? 일단 원리적으로는 안 들어가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여기가 군대라는 자각도.
레이더 관련 업무를 하는 사격 통제반 인원들 중 몇 명이 부대 내에서 멧돼지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대 내 멧돼지라니, 부대의 외곽은 전부 철제 펜스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안 보이던 멧돼지가 출현한 것은 펜스 어딘가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는 의미이다. 펜스는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곳(어떻게 세웠는지 알 수 없는 절벽 부근 등)에도 세워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찾긴 찾아야 했고, 그보다도 먼저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멧돼지를 찾아야 했다. 평소 총 없이 근무하는 일반 병사/간부들이 멧돼지를 마주쳤을 때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당직이었던 G 중위는 근무 중이던 5분 대기조에게 멧돼지를 찾을 것을 명령했다. 당시 근무 중이던 나는 멧돼지를 찾아야 하는 건 이해했다. 하지만,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중위님, 그럼 실탄 지급해줍니까?"
"아니, 실탄 꺼내려면 절차가 복잡해진다. 그냥 한 번 둘러보고만 와 ㅎㅎ"
"???"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면 다인가. 실탄 없이 가면 사실 총 없이 가는 거랑 마찬가지 아닌가. 멧돼지를 상대할 수 있는 무기는 공포탄과 강력한 손전등밖에는 없었다. 나는 5분대기조 차량을 타고 이동하면서 부대를 한 바퀴 돌았고, 결과적으로 멧돼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멧돼지를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노심초사하던 가운데 참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급부대에서 지침이 내려왔다. 최근 북한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소형 비행물체(드론) 등이 발견되었으니, 각별히 유의할 것. 공군사관학교 출신 부대장 H는 내가 상병이 되던 즈음 새로 부임했는데, 과연 FM 그 자체였다. 그는 정문 근무를 서는 헌병들에게 명령했다.
"앞으로 정문에서 근무할 때 하늘도 경계해라.
날아가는 비행체가 있으면 시간과 방향을 전부 기록해라. 비행기, 전투기 포함."
"???"
레이더가 돌아가는 부대인데, 육안으로 하늘을 감시하라는 건 무슨 말인지. 하염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란 말인가. '평소처럼 근무하되, 저공비행하는 비행체가 있으면 신속하게 보고하라'는 지시도 아니고, 지나가는 비행기, 전투기 전부 기록하라는 지시를 내린 H 당신은 대체.
평화로운 평일 오전. 새내기 생활관에 헌병 후임이 전입 왔다는 소식에 궁금함을 참지 못한 헌병반 대원들은 차례로 구경을 갔다. 멀리서 생김새만 한 번 보려는 무해한 의도에서 출발하였으나, 사실 이는 지양해야 할 행동이었다. 주임원사 발로 새내기 생활관에 찾아가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위압감을 조성한다는 이유였다. 응당 이해할 수 있는 지시사항이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은가.
부대 전체는 동기생활관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새내기 생활관만큼은 선임 1명이 생활관장으로 함께 생활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같이 구경하러 간 후임 한 명과 생활관장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생활관장은 나보다 한 달 일찍 들어온 선임이었고, 시비가 붙은 후임은 나보다 두 달 늦게 들어온 후임이었으니 상호 간의 기수 차는 3 기수. 가깝다면 가까운 기수지만,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기수 차이가 있었다. 둘 다 한 성격 하는 사람인지라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니 뭔데 여기 오는데"
"그냥 새 후임 온다고 해서 얼굴만 보러 왔습니다."
"오면 안 되는 거 모르나"
로 시작한 말싸움은 점점 격해졌고, 나는 그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중략)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옵니까. 아니 OO 상병님은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저한테 악감정 있습니까?"
"뭐라고?"
덩치로는 부대 최고였던 OO상병은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몸을 들이밀었다. 이런 액션은 중학교 졸업하고 처음봤다. 유치하긴 하지만 일촉즉발의 상황.
(중략)
"제가 이발병 그만두겠습니다."
"그럼 내 머리는 누가 잘라주는데"
"???"
그 사이에 껴 있던 나는 서로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두 사람의 대화의 흐름을 놓친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그럼 내 머리는 누가 잘라주는데' 라니? 이건 위협인가 구애인가. 왜 화난 표정으로 몸을 들이밀면서 이렇게 다정한 말을 내뱉는 걸까. 끝내 OO 상병은 XX 상병의 뛰어난 이발 솜씨에 중독되어버린 것인가.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혼자 웃참모드에 들어갔다. 둘은 대화의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침 튀기는 싸움을 이어나갔고, 말싸움은 지나가던 병장에 의해 중재되었다. '내 머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XX아. 그런데 네가 이발병을 그만두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러니까 좀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