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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되지 않는 삶

삶을 돌아보게 되는 힘

by 닥터브룩스

피터 드러커가 말했다.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쳇바퀴를 도는 듯한 삶을 살아간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비슷한 동선을 그리며,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동작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곤 한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짙어진다. 젊을 때는 게으르다는 핑계로, 나이가 들어서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거대한 일상의 관성, 즉 타성에 젖은 삶은 어쩌면 인간의 기본값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자신이 처한 불리한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고 놀라운 성취를 이루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평범한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어떤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결국 '삶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될지도, 아니 반드시 귀결되는 사유의 흐름을 가져야 한다. 글의 앞머리에 언급한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의 말인 "측정되지 않는 것은 관리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 시스템을 통제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량적인 수치가 기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수치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려주고, 설정한 기준값, 즉 임계점에 도달했는지 미달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에 관리에 매우 유리한 측면이 있다. 요즘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워치 등을 통해서 인간은 '데이터화된 자아(Quantified Self)'라는 모습을 가지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런 흐름 속에서 걸음 수, 수면 시간, 심박수 등의 생체 데이터와 소득, 순자산 등의 금융 데이터, 쇼핑, SNS, 동영상 등의 소셜데이터 등 인간의 삶의 많은 부분을 숫자로 바꾸려 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건강을 '관리'하고 재정을 '개선'하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거대한 함정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삶은 관리되어야 할 시스템 이전에, 경험되어야 할 과정 그 자체다. 우리가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예컨대 사랑의 깊이, 우정의 질, 내면의 평화, 지혜나 창의성, 혹은 순간의 충만한 기쁨 같은 것들은 숫자로 환원될 수 없다. 드러커의 격언을 삶에 무분별하게 적용할 때, 우리는 '굿하트의 법칙'이 경고하는 위험에 직면한다. "측정치가 목표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좋은 측정치가 되지 못한다." 측정하기 쉬운 것, 가령 소득이나 근무 시간만을 목표로 삼고 '관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측정할 수는 없지만 훨씬 더 중요한 가치들, 예컨대 가족과의 관계나 윤리적 신념, 정신적 여유를 희생시킬 위험이 있다. 이것이 비즈니스 논리를 삶에 직접 대입할 때 발생하는 근본적인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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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mmi.ai Ⓒ Viri Gutiérrez


그렇다면 삶의 개선을 위한 측정은 불가능한 것인가, 혹은 무의미한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측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측정은 누군가를 차가운 숫자로 '재단'하는 행위가 아니라, 더 잘 살기 위해 자신을 돌보는 '점검'의 행위여야 한다. 병원에서 활력 징후를 확인하듯, 우리는 삶의 토대를 점검해야 한다. 몇 시에 자고 일어나는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충분히 움직이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이것은 자신을 직원처럼 통제하는 '관리'가 아니라, 정원사가 식물이 자랄 토양을 '보살피는' 행위에 가깝다. 이 기본적인 토대가 건강해야만 그 위에서 어떤 유의미한 성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측량'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수 있다. 측량사가 땅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지형의 특징과 경계를 파악하듯, 우리는 삶의 질적인 영역들을 측량해야 한다. 나의 꿈은 무엇인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지금 자신의 마음 상태는 자신감에 차 있는가, 아니면 힘이 빠지는 도중인가. 끝까지 완주할 체력과 마음가짐은 준비되어 있는가. 이것은 "내 꿈은 10점 만점에 8점"이라고 점수를 매기는 것이 아니다. 대신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나의 목표는 정확히 무엇인가?", "앞으로 마주할 지형(장애물)은 무엇인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점검과 측량을 통해 우리는 '점수표'가 아닌 '지도'를 얻게 된다. 점수표는 우리에게 합격과 불합격의 낙인을 찍지만, 지도는 우리가 나아갈 최선의 경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아 인식(Self-awareness)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이 지도를 펼쳐보지 않는다. 왜 우리는 그토록 쳇바퀴, 즉 관성의 삶에 머무르려 할까. 단지 게으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쳇바퀴는 우리에게 강력한 심리적 이점을 제공한다. 예측 가능성이 주는 안정감, 습관이 주는 뇌의 에너지 효율성(저전력 모드)이 그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 일상은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되어, 쳇바퀴에서 내려오는 것을 마치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강물이 수천 년에 걸쳐 가장 저항이 적은 경로를 따라 흐르며 자신의 물길을 더욱 깊게 파고드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한번 길이 나면, 강물은 다른 길로 흐르기 어렵다. 우리의 뇌 속 신경망도 마찬가지다. 습관은 편안하고 익숙한 물길이며, 이 경로를 벗어나는 데는 막대한 '활성화 에너지'가 필요하다.


반면, 이 거대한 마찰력을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 마찰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보통 사람보다 더 큰 장애물(가난, 역경, 신체적 한계)을 가진 경우가 많다. 차이는 그들을 뒤로 끌어당기는 '마찰력'보다 더 강력하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미는 '이유', 즉 '목적의식'을 가졌다는 데 있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나치 강제 수용소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른 결정적 차이가 '의미'와 '목적'에 있음을 발견했다. 내일 아침에 자신을 기다리는 과업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즉 살아야 할 '왜(Why)'가 분명한 사람들은 거의 모든 '어떻게(How)'를 견뎌냈다. 그들은 자신의 처참한 현실 너머에 있는 '목적지'라는 지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쳇바퀴란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자신들을 목적지로 데려다주지 못하는 무의미한 공간일 뿐이었다. 결국 '훌륭한 사람'이란 고난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이 안락함보다 더 절실한 사람이다.

(이런 부분은 기획관점과도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강력한 '왜'를 발견하고, 매일의 관성에서 벗어나 의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해답은 놀랍도록 단순한 실천에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 매일 자신에게 "나는 오늘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가 논의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엔진'이다. 이것이야말로 삶을 '측량'하는 가장 실질적인 행위다. 이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었는가"(의도)와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현실) 사이의 간극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만족스럽다면, 우리는 다음 날을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만약 답이 불만족스럽다면, 즉 "오늘도 그저 쳇바퀴만 돌렸을 뿐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건강한 긴장감과 절박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긴장감이 우리로 하여금 다음 단계의 더 깊은 사유, 즉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고민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것이 바로 성찰을 통한 개선의 순환 고리다. 이 일상적인 질문이 없는 삶은 반응과 습관으로만 채워지는, 그저 이끌려가는 삶이다. 반면 이 질문이 있는 삶은 성찰과 설계로 채워지는, 주도하는 삶이다. 이것은 삶을 억압하는 관리가 아니라, 삶을 자유롭게 하는 자아 인식의 훈련이다. 평가를 위한 측정을 위한 측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왜'에 대한 초점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스스로를 점검하고 측량해야 해야 하는 할 것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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