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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유랑자 Jul 16. 2020

여백의 미

그래도 빈 벽을 용인할 수 있는 사회

원래 디자인을 할 때 내 취향은 미니멀에 가까웠다. 다소 심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여백이 느껴지는 그런 공간 말이다. 옛날부터 나는 다소 황량한 느낌을 좋아했었다. 특히 명절에 텅 빈 서울을 바라볼 때, 언제나 꽉 차 있는 그곳이 숨 죽은 것처럼 텅 빈 그런 공간 말이다. 그런 취향 때문에 가끔은 너무 비웠나 싶게 공간을 비우는 디자인을 추구했었다


한국에서 디자인을 할 땐 으레, 나의 상사나 클라이언트들은 빈 벽을 못 견뎌했다. 다소 강박적으로 무언가를 채우려 했다. SPA 브랜드 공간을 디자인할 때 같이 빽빽히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공간은 나 역시도 동의했지만 다소 비워도 되는 벽 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의 정서는 원래 여백의 미를 중시하고 전통한옥의 공간 역시 미니멀에 가까운대도 불구하고 바쁜 현대 사회를 살아서인지 다들 그러했다.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다들 채우고 싶어 하고, 잠시 숨을 쉴 여지를 주는 아무것도 없는 흰 벽을 채우려 하고 놓을 것이 없으면 액자라도 두고 싶어 했다.


스웨덴에 와서 일을 하면서 그 부분은 나와 참 잘 맞았다. 어느 날 프랑스 파리에 있는 직영 매장을 디자인을 할 때 일이다. 나 역시도 손에 익은 일의 습관대로 강박적으로 매장을 채우고 있었다. 카운터 벽 옆에 어느 공간이 남았는데 나는 화분으로 그곳을 채웠다. 리테일팀의 동료가 먼저 나에게 “그 벽 정도는 빈 벽으로 둬도 되지 않아?”라고 하는 것이다. 머천다이징을 담당하는 그 친구가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세일즈에 수량을 담당하는 리테일팀에서 공간을 비우자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가끔은 디자인을 손상시키더라도 그 담당들은 기본적으로 많은 수량의 제품을 진열하고 싶어 한다(하이패션 브랜드나 럭셔리한 호텔 같은 공간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 업무를 담당하는 친구가 나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나는 너무 고맙고 또한 충격이었다.


공간을 비우는 것은 단순히 디자인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업무를 하다가 커뮤니케이션 실수로 보내야 하는 기한에서 하루 늦어진 적이 있었다. 당연히 리테일팀장은 그 실수를 모두 나를 탓하였고, 나는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싶었기에 나의 에이전시 디렉터에게 “미안 오늘 디자인을 브라질에 보내지 못할 것 같아 아마도 소통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아. 나의 실수가 커”라고 말하니 그녀는 아주 다정하게 “너는 재능 있고 유능한 사람이야.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 하루 늦는다고 지구가 망하지 않아. 그냥 우리는 하루 늦는다고 메일 보내고 기다려 달라고 하면 돼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하는 것이다. 너무 단순한 위로인데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나의 상사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너무 위로가 되었다. 한국에서 10년 넘는 직장생활 속에서,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런 식의 반응을 하는 상사는 손에 꼽았다. 그녀는 일정이 빠듯하면 그 일정을 조율할 줄 알았고, 한 번의 실수는 용납하는 관용이 있었다. 스웨데에서 일을 할 때 실적이나 실력도 중요하지만 동료와의 화합을 우선시하고 한국보다는 덜 압박을 하는 편이다. 디자인에서 빈 벽을 용인하듯, 실제 생활에서도 그곳은 조금은 빈 벽을 허용해 준다. 숨을 쉴 곳은 마련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이 디렉터가 회사를 LA지사로 옮긴 후 회사는 미국식으로 실적주의 회사로 바뀐다)


그리고 과중한 업무로 휴가 없이 일을 하면 상사가 먼저 휴가를 권고하기도 했다. 요즘 업무가 매우 많아 보이는 데 잠깐 휴가를 갈 예정은 없느냐 라고 묻는다. 스웨덴의 법정 휴가일 수는 법정 공휴일을 제외하고 최소 25일이다. 25일을 붙여 쓸 수도 있고 나누어 쓸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15일의 연차가 제공되기는 하나, 그 마저도 대기업이나 일정 규모의 중소기업이 아니면 공휴일을 연차에 포함시켜서,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휴가 일 수 가 없는 회사도 많다. 그리고 공휴일을 포함시키는 회사마저도 회사에 따라 눈치를 주거나 인사고과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하는 회사도 많다.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5일 이상 휴가를 붙여서 쓰는 것은 소수의 회사를 제외하면 상상도 못 하는 일이다. 직원들의 피와 땀을 갈아서 회사가 돌아가니, 애사심 같은 것은 생길 수가 없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극소수의 애사심을 가진 사원이나 대표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강요하는 모습에 가깝다. 그렇다 보니 모두가 피로하고 날카롭고 예민해서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일터가 전쟁터만큼의 스트레스를 야기한다. 우숫갯소리로 누구나 가슴 한편에 사표 하나쯤 품고 다닌다 할 정도의 스트레스를 안고 회사를 다닌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다니던 시점만큼은 그랬다.


스웨덴은 그 여백을 허용하는 만큼이나 남는 시간이 많고 또한 그 시간 동안 할 것이 마땅치 않은 나라기도 하다. 한국의 단점이자 장점은 내가 쉬지 않고 일하는 만큼 누군가도 나의 퇴근 시간 이후에 일을 한다. 하고자 하면 배울 것도 많고 퇴근 후 직장인을 위한 무수한 강좌가 많다. 게다가 퇴근 후 카페에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게 24시간 영업을 할 수도 있으며 미용실에 가거나 영어회화를 배우거나 할 수 있다. 한 나는 그것은 한국만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스웨덴은 여백을 허용하는 것인지 할 것이 없어서 여백을 강요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여백을 허용하는 사회는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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