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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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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Oct 07. 2020

20.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쿠훌바, 사자야!

또래 친구들보다 말이 좀 늦었던 하레는 한동안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아가'라고 불렀다.

엄마, 아빠 동물이 나와서 아가를 애지중지 예뻐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면 "아가야~!"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좋아했다.

자기도 그렇게 '사랑받는 아가'라는 사실이 너무 좋은 것 같았다.




만 2.5세, 한국 나이로는 '미운4살'.

하레는 툭하면 '시어(싫어)'를 남발했다.


하레가 입으면 귀여울 것 같은 새 옷을 장만했다.

베이지색 바탕에 입체적으로 사자 갈기와 꼬리가 표현된 가오리 티셔츠에 브라운과 블루 스트라이프 골지 쫄바지 셋업이다.

예쁘게 입혀서 어린이집에 보낼 생각에 나는 매우 들떴는데, 하레는 안 입겠다고 고집스럽게 버텼다.

"시어!"

평소 입던 스타일의 옷이 아니라서 낯선 모양이다.


기저귀를 갈면서 공룡 장난감을 손에 쥐어주고 하레가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얼른 옷을 입혔다.

그리고 내방으로 데려가 거울을 보여주었다.

티셔츠에 달린 사자 꼬리를 흔들면서 "사자야! 사자! 어흥~!!"할때만 해도 하레는 탐탁지 않아했다.


그런데 그 날 어린이집에서 하루종일 선생님도, 친구들도 하레의 사자 티셔츠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모양이다.

집에 와서도 내내 벗지 않겠다고 하고, 저녁먹을 때 옷을 가리는 턱받이도 안하려고 하고, 아빠가 목욕하기 전에 옷을 벗기려고 하자 대성통곡을 했다.

아침엔 그렇게 안 입겠다고 버티더니...

하레아빠와 나는 새 옷을 입고가서 받았던 '관심'이 너무 좋았던 모양,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빠랑 목욕을 하면서도 내내 울어서 긴 속눈썹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나온 하레에게 공룡 잠옷을 보여주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우와, 이게 뭐야!! 공룡이잖아! 여기 빵빵 자동차도 있네? 멋지다!"

그제서야 기분이 풀린 하레는 공룡 잠옷을 입고 울음을 그쳤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이었다.

이번엔 공룡 잠옷을 '벗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건 '코~'잘때만 입는 옷이야,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제 겨우 2.5세가 사회적 규범이고 드레스 코드고 뭐고 알게뭐람?

'공룡'과 '빵빵'이 그려진 옷을 절대 벗지 않겠다고 막무가내였다.

더이상의 설득은 어려울 것 같아서 어린이집 가방에 갈아입을 옷을 넣은 뒤, 잠옷을 입고 등원하기로 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웃으시며 '아이가 편하게 놀 수 있는 옷이면 됐다'고 하셨다.


그 날 이후 하레 아빠와 나는 아이가 '무슨 옷을 입든' 똑같은 양의 관심을 가져주기로 했다.

어떤 옷을 입어도 그 '옷' 때문이 아니라, 그 옷을 입은 '니'가 사랑스러운거야.

매일 아침, 거울 앞에 하레를 세우고 '멋진 옷'이 아닌 멋지게 옷을 입은 '하레'를 칭찬해 주었다.


새로운 것,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무조건 '시어'를 남발하는 하레를 보면서 느낀 것도 있었다.

내가 하레를 위해 준비한 '좋은 것', '맛있는 것', '새로운 것', '즐거운 자극'들에 하레는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시어!"라고 단호하게 외친다.

혹시 나도 내 인생이 나에게 새로움, 즐거움, 좋은 것들 가져다 주려고 하는데도 낯설고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시어!"라고 외치며 '익숙한 불행' 속에서 편안해하고 있는건 아닌가?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거인'처럼 느껴진다고 하길래 되도록이면 하레와 이야기를 할 때는 쪼그려 앉아서 눈높이를 맞추곤 했다.

어느 날은 길을 걷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레가 갑자기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신호를 기다릴때면 내가 늘 자기 옆에 쪼그려 앉아서 기다리는 걸 보고는 그대로 따라한 거였다.


또 하루는 어린이집을 마친 하레와 자전거를 타고 발길 닿는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창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면 길을 건널 수 있다'며 신호등의 개념을 알려주던 때였다.

차가 뜸한 사거리에서 금방 놓친 신호가 돌아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에이, 모르겠지' 하고 그냥 길을 건넜다.


그런데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하레가 '빨간색'에 길을 건넜다고 엉덩이까지 들썩들썩 거리면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자전거를 멈추고 미안하다고 '앞으로는 초록색에 건널께' 하고 사과를 하고나서야 겨우 진정이 됐다.


'자신'의 바깥으로 깨어나온 하레는 주변의 모든 걸 유심히 관찰하고 그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오싹하리만치 내 모습을 그대로 거울처럼 비춰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하레를 보며, 와, 저 작은 아이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정말 '똑바로'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과 행동 모든 걸 조심해야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레가 살던 곳은 통행하는 차량이 적어 한 낮엔 아파트 단지 근처를 빼면 신호등이 무용지물인 곳이 많았다.

하루는 마트에 다녀오는데, 차가 한 대도 없는 거리에 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손을 잡고 신호를 기다리는 엄마를 봤다.

평소 같았으면 '아니 차도 없는데 도대체 왜 기다리는거야?'하고 대수롭지 않게 건넜을텐데, 이제는 그 엄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는 질서를 위한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지키는 법'을 가르치려는 엄마의 마음을.

그래서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던 그곳에서 우리 셋은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뀔 때까지 가만히 자리에 서 있었다.




금요일 저녁.

저녁밥을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바닥청소를 간단히 한 뒤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거실에서 놀던 하레가 "가?"하고 물었다.

"응. 고모 집에 가. 두 밤 자고올께!"하자, 하레는 나에게 "쿠훌바."라고 말했다.


무슨 말이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자, 하레가 작고 따뜻한 손으로 다정하게 내 손을 잡더니 나를 내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거울 앞에 나를 세우고 환한 표정으로 "쿠훌바!!"라고 다시 말했다.

내가 여전히 못 알아듣자, 손가락으로 내 셔츠에 그려져 있던 호랑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자야!"


 나의 사자(!) 셔츠



'쿠훌바'는 '거울 봐'라는 말이었다.

아아, 그 순간 나는 영화 <아멜리에> 속의 아멜리처럼 내 온 몸이 이대로 촤르르 녹아내려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비디오클립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nIGJRXK5L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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