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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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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Oct 11. 2020

22. 네 살짜리 아이의 멱살을 잡을뻔했다.

우린 다 정말로 몰랐던 거구나.

하기오: 저희 엄마는 활화산 같은 사람이에요(웃음). 신경이 예민해서 1년 365일 내내 화를 내죠.

사이토: 계속 분화중이군요.

하기오: 네. 쉬지 않고 분화해요. 어렸을 때 "왜 그렇게 날마다 화를 내?"하고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엄마는 "나는 부드러운 사람이야"라고 대답했죠. "너희 외할머니가 나를 너무 엄하게 키워서 힘들었거든. 그래서 내 딸한테는 부드럽게 대하기로 마음먹었어. 그런데도 화를 내는 이유는 네가 말을 안 듣기 때문이야"라고 하면서요.


<나는 엄마가 힘들다> p.121 사이토 다마키





나는 부모로부터 듬뿍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변덕스러운 엄마 밑에서 언제 엄마가 폭발할지 몰라 가슴을 졸이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이상적인 부모와 자식관계에 대한 나름의 판타지를 갖고 있었다.

물론 당시엔 그런 '판타지가 있다'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지만.


놀이터에서 집에 안간다는 아이에게 "그럼 엄마는 간다!"하고 돌아서서 걷기 시작하는 엄마를 보면 '참 매정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울면서 엄마를 쫓아가잖아!

아이가 '충분히 놀았다'라고 느낄만큼 놀이터에 있어주면 안되나?

나는 하레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줘야지!

그때의 나는 지나치게 비장했던 것 같다.




내가 어린이집에 도착했을때, 하레는 무슨 일 때문인지 이미 한바탕 울어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신발을 신고 집에 갈 준비를 하면서도 까탈스럽게 굴었다.


이 날 아침엔 미세먼지가 심했고, 오후엔 비가 내렸다.

어린이집을 마친 하레는 늘 하던대로 놀이터에 가서 놀겠다고 했다.

"오늘은 비가 와. 빵빵(지하주차장)으로 가야해."

하레는 바깥으로 나가겠다고 막무가내였다.


우산도 안가져왔고, 공기중의 미세먼지가 씻겨져 내리는터라 절대 맞으면 안되는 비였다.

결국 고집스럽게 현관에 버티고 선 아이를 들쳐 메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레는 지하 주차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를 내며 발버둥까지 치며 울었다.

항상 말을 '잘 듣던' 아이가 갑자기 이렇게까지 떼를 쓰자 당황스러웠다.


쌀 한 가마니 무게의 아이가 발버둥까지 치니 너무 힘이 들어 잠시 내려놓고 통유리창으로 데려가 바깥을 보여줬다.

"저것 봐. 비가 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하레는 맞은편에 차가 오는데도 막무가내로 뛰쳐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화가 치솟으며 아이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솔직히 아이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면서 "비가 온다고 했잖아!! 몇 번을 말해!! 저건 더러워서 맞으면 안된다고!!!"라고 나도 주차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화남'과 '놀람'이 내 안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서른살은 더 먹은 내가 애랑 똑같이 굴면 안되지,하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

어린이집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하레의 눈물, 콧물을 닦고 발버둥 치는 아이를 들쳐 메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이는 도무지 진정하고 집에 걸어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대로 집에 가봤자 하레는 계속 울기만 할 것 같아서 바깥으로 나갔다.

나의 '이성'은 나에게 '아이에게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해줘.'라고 하는데, 여전히 멱살을 잡고 싶었던 격앙된 감정이 남아 있어 다소 내팽개치듯 아이를 바닥에 내려놨다.


비를 조금 맞혀주며 말했다.

"저기봐!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지?

얼굴에 '탁탁탁' 하지?

비가 오는거야. 비! 비야.

길에는 아무도 없지?

형아도, 친구도, 놀이터에 없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미끄럼틀 못타. 안돼!"


그런데 놀랍게도 하레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하!'하며 밝아졌다.

하레는 정말 '비'가 뭔지 몰랐던 것 같았다.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걸 처음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은 왜 놀이터에 갈 수 없는지 '이해'하고 마음이 풀린 것 같았다.


세 돌이 다가올 무렵이니, '당연히' 비가 뭔지 알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당황했다.

비가 와서 바깥에서 놀 수 없는걸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떼를 쓴다고만 생각했다.

하긴 하레엄마가 아이를 대했던 걸 생각해보면 아이가 '비'를 모르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우리 이제 집에가서 공룡 까까 먹을까? "하고 묻자, "녜~"하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된 하레가 대답했다.


하레는 집에 와서 간식을 먹으며 손으로 창 밖을 가리키고 다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탈탈탈."(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진 걸 표현)하고 말했다.

간식 때문인지, '비'라는 걸 알게 되서인지 하레는 조금 신나보였다.

그 날 이후로 하레는 비가 오는 날은 '탈탈탈'이라며 '빵빵'으로 가야한다고 지하 주차장으로 제 발로 알아서 걸어 내려갔다.




하레가 간식을 먹는동안 '나의 분노'에 대해 생각했다.

'어째서' 내가 사랑하는 하레의 멱살을 쥐고 거칠게 흔들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강하게 일어났던거지?

시시때때로 감정을 폭발시키곤 하는 '엄마'라는 반면교사가 없었더라면, 지하주차장에서 어쩌면 나도 정신을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말 아찔했다.


분노가 일어났던 주된 이유는 '이렇게 울면 안되지!'하는 내 '생각'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정말로 '비'가 뭔지 몰랐다.

그래서 울었다. 놀이터에 못가서 속상하니까.

지극히 아이다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또 내가 아이였을 때, 폭발하던 엄마밖에 본적이 없던 나는 아이가 투정을 부리자 '자동적으로' 화가 났던 거구나.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


우리는 다 '몰랐던' 거구나.

하레는 '비'를 모르고,

나는 하레가 '비를 몰랐다'는 걸 모르고,

엄마는 내가 아직 '아이'였다는 걸 모르고.

폭발을 멈출 '브레이크'가 고장난 엄마는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 제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몰랐던 거구나.


아이가 너무 척척 말을 잘 들을땐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더니,이렇게 너무 떼를 써도...

아니야, 차라리 이렇게 떼를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이가 떼를 쓸 때, 제지하고 바른 행동을 가르쳐줄 다양한 방법들을 알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안의 '엄마'가 자동으로 튀어 나오는 일을 막아야 한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하레는 요리하는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칭얼거리고 울었다. 

공룡 스티커를 싱크대 서랍에 붙였다가, 바닥에 던졌다가, 그게 자기 발에 붙었다고 짜증을 냈다.

그리고는 비행기를 타다가 머리를 쿵했다고 우렁차게 울었다. 

머리가 아프니까 밴드를 붙여 달라고 했다. 

나도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마 한가운데 동그라미 모양의 뽀로로 밴드를 붙여 주었다.


후.

'엄마'는 진정한 멀티태스커구나. 

이런 순간일수록 잠시 모든 걸 멈추고 상황을 그저 바라보자,고 생각했다.


아빠랑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못 잘라 뚜껑같은 바가지머리를 하고 뽀로로밴드를 이마 한 가운데 붙인채 떼를 쓰는 하레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오늘은 어린이집에서도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다,라고 키즈노트에 적혀 있었다.

드디어 하레 안의 개구쟁이가 이제 눈을 뜨기 시작했나봐,하는 생각에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다음 날, 하레는 놀이터에서 같이 놀던 형아의 공룡자동차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저건 형아꺼야."라고 하자, 어제 지하 주차장에서처럼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또 들쳐 메고 집에 오는 내내 울었다. 

집 앞에서 내려놓자 놀이터가 있는 쪽으로 마구 내달렸다.

내가 "하레, 안녕!!"하고 집 쪽으로 걸어가자, 발을 동동 굴러 가면서 어쩔 수 없이 내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엄마들이 아이를 놔두고 "안녕!"하고 돌아서는게 참 '매정하다' 싶었는데, 나도 이걸 쓰게 될 줄이야.


집에 온 하레는 계속 울면서도 배달된 택배가 뭔지 궁금했는지 "이게 뭐야 엉엉엉. 이게 뭐야 엉엉엉."하면서 울었다.

나는 화가 나면서도 웃겼다. 

어제의 경험도 있으니, 오늘은 그저 차분하게 대처하자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장난감을 달라고 울면서 조르는건 '안되는 일'이 분명하니까 단호하게 계속 안 된다,는 자세를 유지했다. 

'안되는 일'로 울면서 떼를 쓰면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하레의 내일치 어린이집 가방을 챙겨서 문 앞에 갖다 놓는 등 내 할 일을 했다.

이러다가 하레는 자기가 울어도 관심을 못받는다고 생각하는건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하레는 울면서 "까까!!"를 부르짖었다.

"손을 씻지 않으면 까까를 먹을 수 없어!"라고 말하자, 손을 씻기 싫다면서 베란다 앞에 가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다시 한 번 "손을 씻은 사람만 까까를 먹을 수 있는거야."라고 말하고 잠시 놔두었다.


진정이 된 하레는 손을 씻자고 했고, 까까를 먹을꺼냐고 묻자 먹겠다고 해서 식탁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하레가 울면서 난리치는 모습을 흉내내면서 그러면 '안돼'라고 했고, 남의 장난감은 허락없이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고 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아이가 진정될때까지 놔두면 혹시 '무관심'으로 오인할까,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하레는 간식을 먹으면서 금새 밝게 돌아왔다.

이때 이제 정말로 하레에게 '걱정'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결핍이 있는 아이', '문제가 있는 아이',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아이'가 아닌 '그냥 미운 네 살'로 봐도 되겠다고.




요즘 키즈노트에 '오늘도 말을 안들었다'는 말이 올라올까봐 조마조마해.

저녁을 먹으면서 하레 아빠가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 안듣는게 정상이야.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거라고. 애기가 너무 말을 잘 듣는 게 이상한거지."라고 말했다.

하레가 이렇게 울고 불고 발버둥치는 게 괜찮은척 하면서 꾹꾹 참으면서 속으로 삭이는 것보다 백 배 좋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훈육이 필요한 순간에 잠시 '관심'을 거두고, 아이가 진정되도록 놔둬도 괜찮다,라는 걸 알게 되니 더더욱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위해서 내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들은 귀로 들은 것을 거의 잊어버린다.  

    아들은 눈으로 본 것을 거의 기억한다.  

    아들은 직접 해본 것을 이해하고 내면화한다.  

<아들 키울 때 꼭 알아야 할 12가지> p.127 - 이안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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