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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만 Jan 14. 2020

나는 어떤 말을 하는 사람일까

오만의 마음치유 일기 3 - 편안한 관계를 위하여


자꾸 거슬린다. 카페 옆자리의 남자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게 정확한 팩트입니다. 맞죠?"


팩트를 강조하는 남자의 말버릇에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누구나 골드가 될 수 있어요."

역시나 남자는 다단계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개미'를 무시했다.

매일 일하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평범한 사람들을 비웃었다.

"사람들이 이 회사를 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잘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사실을 봐야 해요. 우리는 팩트를 알잖아요."

남자의 말 습관은 이 남자가 얼마나 허황된 얘기를 하는지, 거짓 약속을 하는지를 보여줬다.

그를 통해 과연 나는 어떤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일까 생각해 보았다.




오늘 마음 치유 상담의 주제는 '용서'였다. '오제은 교수의 자기 사랑 노트'의 네 번째 장을 읽고 용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용서가 중요한 건 알겠는데, 이 책은 용서에 대해 너무 쉽게 쓴 것 같아요."

책에는 어린 시절 엄마를 때리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버지를 마음속 깊이 원망하던 어느 목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상담자인 오제은 교수는 그의 속마음을 끌어내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하고 싶던 말을 하게 하고 그 과정을 통해 결국 아버지를 용서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내가 가진 의문은 용서가 이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였다.


용서에 대한 많은 말 중 가장 공감이 갔던 것은 오프라 윈프리가 그녀의 토크쇼에서 한 말이었다.

"용서란 과거에 자신이 받은 상처로 인해 현재의 내가 더 이상 영향받지 않는 거예요."

다행히도 이 목사는 상담을 받은 이후 유년기 가족에 대한 아픔에서 벗어나 현재의 아내와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이처럼 제대로 된 용서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십수 년이 훨씬 지난 과거가 꿈이 되어 지금의 나를 괴롭히는 것을 보면 역시 아닌 것 같다.


사실 내게는 내가 용서해야 할 과거보다 용서를 받고 싶은 과거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내가 용서해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 욕심에 키우게 되었던 개는 산책이 부족해 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더 잘 키울 수 있다는 사람에게 떠넘기듯 줘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발정기였던 그 개의 행동을 무지했던 나는 이상하게만 생각하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그 개에 대한 기억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꿈속에 빈번히 나타났다. 개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며칠간 밥을 주지 않아 개가 죽어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꿈 말이다.    


이보다 더 부끄럽고 죄책감 느끼는 일은 중학생 때 같이 살게 된 사촌동생과 관련해서이다. 집안 사정으로 부모와 떨어져 우리 집에서 일 이년 정도를 함께 살게 된 그 아이를 내가 얼마나 못되게 괴롭혔는가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에 열이 오른다. 스무 살이 되는 해 첫 명절에 그 아이를 만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에게 돈을 쥐어주며(그렇게라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사과를 하는 일이었다.

"그땐 나도 너무 어려서..."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 아이에 대한 꿈은 계속되었다. 성인이 된 후부턴 명절에 얼굴을 보이지 않던 그녀를 몇 년 만에 만나게 되는 일이라도 생기면 며칠 전부터 심장이 뛰었고 만나서는 눈도 못 마주쳤다.

시간이 흘러 조금 괜찮아지나 했지만 얼마 전 그 아이가 여전히 사촌 형제들을 원망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또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그 아이와 관련한 과거는 내게도 상처지만 그 아이에겐 더한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내가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친척 형제들에게 털어놓자 A가 말을 받았다. 그 아이가 자신의 집에 살았던 때에 A의 형제도 그 아이에게 못 되게 굴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니, 결국 우리도 피해자야. 그땐 우리 모두 어렸고 우리 의지 없이 그냥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됐던 거야. 우리가 걔한테 상처 준 건 알겠는데 이젠 걔도 우리도 다 성인이잖아. 언제까지 그 일에 얽매여 있을 거야."

성인인 우리는 이제 그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A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것은 내가 상처 입힌 아이가 다른 집에 가서도 구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정심이나 미안함이 아닌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만 못 되게 군 것이 아니었구나, 걔네가 나보다 더 못 되게 대했었으면 좋겠다, 그럼 나보다 그들을 더 원망할 테지. 그런 생각을 하던 나 자신의 얄팍함에 치가 떨렸다.

 

영화 '밀양'이 생각난다. 신애(전도연)는 자신의 아이를 유괴해 죽인 유치원 원장을 용서하기로 한다. 어렵게 결심을 하고 찾아간 교도소에서 원장은 평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이미 신께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무너진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근데 내가 어떻게 다시 그 사람을 용서하냐고요!"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 또는 스스로를 용서한다는 것이 이처럼 본인이 편해지기 위함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닐까. 이런 생각에 대해 상담사인 형님은 이렇게 반응했다.


"자신을 위한 용서는 안 되나요? 자기 자신이 편해지려고 용서를 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옳지 않은 걸까요?"
   

용서를 구하기 전 나의 모습과 용서를 구한 후 나의 모습


"그럼 용서를 받고 싶은 상대와 대화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볼래요? 왼쪽에는 용서를 구하기 전, 오른쪽에는 용서를 구한 후의 모습을요."


그림을 보면 용서를 구하기 전의 모습은 상대를 쳐다보지 못한다. 머릿속과 다른 의미 없는 말을 주절거린다. 하지만 용서를 구한 후에는 상대와 눈을 마주친다. 상대와 같은 말을 한다.


"항상 눈을 먼저 그리네요."

"눈에서 많은 말을 하잖아요. 용서를 구하기 전에는 눈도 못 마주쳐요. 속마음이 들킬까 봐요. 사실 평소에도 사람들이랑 눈을 잘 못 마주치는데, 눈을 마주치면 제가 읽히는 것 같아서 불편해요."

"속마음이 좀 드러나면 안 돼요?"

"제가 그렇게 좋은 생각만 하는 사람은 아니라서요."


여기서 상담 내용은 용서에서 관계로 방향을 바꾼다.


"제가 봐온 가영 씨는 이성적인 얘기를 할 때는 똑 부러지게 말하는데, 감정에 관한 얘기를 할 땐 늘 말이 길어지더라고요."


전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문자 하나 보내려고 십분 이상을 썼다 지웠다 수정하다 결국 남편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이런 문자를 보냈을 때 상대가 오해하지 않을지를 물었다. 어미 하나에 담길 확고함의 정도에 대해 질문했다.

"남자들을 이런 거 신경도 안 써. 그리고 이런 말이 필요해? 안 해도 될  같은데."

나는 문자를 받는 상대방이 느낄지도 모를 모든 감정을 미리 방어하고 있었다.


형님이 물었다.

"혹시 자신의 마음을 들켜서 문제가 된 일이 있었나요?"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어떤 기억이든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중학생 때였다. 고등학교가 비평준화되어 있던 지역이라 학교에서 입시용 논술 수업을 했다.

수업 시간에 글 한 편을 적어서 제출했는데 국어 선생님이 나를 앞으로 불렀다.

"너, '만의 하나'가 뭔지 모르니? 만 개 중 하나. 만'의' 하나지. 이게 어떻게 '만에 하나'이니? 모르면 아예 쓰질 말던가."

사실 몰랐다. 그냥 들리는 대로 썼을 뿐이었다. 친구들 다 보는 앞에서 모르면 쓰지 말라던 선생님의 꾸지람에 수치심을 느꼈다.


"가영 씨가 평소에 많이 하는 말이 있더라고요."


- 제가 눈치가 없어서 그러는데...

- 제가 몰라서 그런데...

- 근데...


"내가 모르는 걸 남한테 들키는 게 부끄러운 거예요?"


그렇다.

내 말버릇은 나를 보여준다.

습관적 웃음이나 시선을 피하는 것도 내 것(나의 감정, 무지, 한계 등)을 들키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내게 관계가 어려운 것은 이런 행동에 스스로 지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름과 들킴의 반대말을 써볼래요?"


모름의 반대말. 앎.

들킴의 반대말. 드러냄. 숨김인가? 숨김보다는 드러냄이 맞을 것 같은데...


"맞았어요. 들킴의 반대말은 드러냄이죠. 숨김은 들킴과 다름없죠. 스스로 드러낼 줄 안다면 숨길 것도 들킬 것도 없죠.


다르게 표현해 볼까요. 모름의 반대를 궁금함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드러냄은 표현하기로 바꿀 수도 있겠죠?


사람들과 대화할 때 앞으로 자신을 먼저 드러내 봐요.


제가 눈치가 없어서, 라며 미리 스스로를 방어하고 숨기려 하지 말고,


나는 어떤 사람인데. 당신은 어떤가요? 하고 궁금해하는 거죠. 그러면 '그런데' 같은 표현을 좀 덜 쓸 수 있을 거예요."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없다. 그저 비슷하고 다른 정도의 차이다.

이를 인정하고 타인을 대할 때 정답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는 나를 드러내면서 눈을 맞추고 진짜 웃음을 짓자.

한층 관계가 편안해질 것이다.


나를 드러내기. 곧 나를 표현하기. 이것은 대화에서뿐만이 아닌 글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학적인 말이나 사치스러운 문장으로 나를 포장하는 글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는 글. 읽는 사람의 마음을 똑바로 마주하는 글. 진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용서 역시 그래야 할 것 같다. 내가 느끼는 미안함을 솔직히 표현하자. 




다시 카페에서 만난 남자를 떠올린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부푼 기대에 눈을 반짝이는 이 여자는 또 어떤 사람일까.

그를 어떻게 만났을까.

지하철 광고판 구석에 끼워놓은 명함 한 장. 전봇대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주부 환영, 투잡 가능" 이런 문구 하나에 이끌려 온 사람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은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 직업은 있지만 돈이 부족한 사람들의 눈에는 훤히 띄었을 것이다.

내 글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자.

누군가 필요한 이에게 내 글이 읽힐 것이다.

그 누군가를 위해 책임감 있게 글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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