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의 마음치유 일기 13 - 소명을 안다는 것
출판 의뢰가 왔다.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만들고 있는 데 글작가로 참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추천을 받아 연락을 해온 것이지만 그쪽에는 나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이력서를 보냈다. 전에 썼던 책과 함께 이력서 검토 후 연락 주겠다고 했다.
빈약한 내 이력서를 보며 그동안 대체 나는 무엇을 했나 한심한 생각만 들었다.
다시 연락이 왔을 땐 이력서만 보고 결정하기 힘드니 시안을 좀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원하는 주제와 기대 독자 연령층에 대해 알려왔고 최대한 빨리 보내주었으면 한다는 요청을 했다. 첫 연락이 온 직후부터 이미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터라 시안을 빠른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도 색깔이 다른 세 가지 이야기를 준비했다.
메일을 보낸 후부터 가슴이 설렜다. 이야기가 꽤 괜찮다고 느껴져서인지 세 개 모두 출간하자고 하면 어쩌나 김칫국부터 마셨다. 결혼을 하고 거처를 옮기며 함께 글 쓰던 모임에서 떨어져 괜히 나만 뒤쳐진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들 중 누구는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하고, 누구는 커다란 상금이 걸린 공모전에서 수상했다는 등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충분히 만족스럽던 내 생활이 급격히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먼저 두 번째 책을 출간하면 그들보다 앞서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일을 하고 있는 작가라는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는데 연락은 오지 않고 들떴던 마음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불안감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내 삶이 흔들렸다. 내가 글을 못 쓰나? 이야기가 재미없었나? 분명 재밌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감이 없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그땐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에 그동안 글 한 자 못 쓰고 생활도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며칠 전 나는 보낸 세 가지 시안 중 하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받아 글을 진행시키고 있다. 계약은 진행 상황에 따라 추후로 미뤄졌다. 어쨌든 다시 한번 기회를 잡은 셈인데 문제는 아직도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제에 맞는 교훈은 있지만 아이들의 흥미를 끌 재미 요소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재미 요소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이리저리 바꾸고, 화자와 시점을 변화시켰지만 내용에 자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시안에 적힌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결국 거기서 멈췄다.
이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나는 흔들리지 않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남의 비판에 주눅 들지 않고, 또 그만큼 타인의 칭찬에 흥분하지 않는 그런 굳건한 내면은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 지난 상담들을 통해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지만 커다란 기회 앞에 또다시 움츠러들고 쉽게 마음이 요동쳤다. 내 내면이 단단히 채워지지 않으면 이처럼 좋은 기회도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할 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오늘 아침 읽은 니체의 책은 내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문제는 자신이 왜 그것을 하고 싶은지, 왜 그것을 원하는지, 왜 그렇게 되고 싶은지, 왜 그 길을 가고자 하는지... 그 같은 물음에 깊이 사고하지 않고 명백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왜?'라는 의문에 명백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후의 모든 것은 매우 간단해진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곧 알 수 있다. 일부러 타인을 흉내 내면서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자신의 길이 눈앞에 명료히 보이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다. ('우상의 황혼'中)
나는 이 문장을 되풀이해 읽으며 이것이 '소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왜'를 안다는 것. 타인을 흉내 내지 않고 세상의 밀고 당김에도 명확히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소명을 이미 자각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소명에 관해서는 형님과 짧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소명은 나는 '왜' 이 일을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답이자,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다.
나의 첫 책은 기껏해야 내가 동화를 배운 지 한 두 달이 지났을 무렵에 운 좋게 계약된 것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 책을 낸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나도 누군가에게 당당하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신이 났었다. 그게 2018년도의 일이다. 지금 누군가 '무슨 책을 냈어요', '책 제목이 뭐예요' 묻는다면 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얼버무린다. 첫 책의 부족함이 이제는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을 또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 지금은 <그림책 쓰는 법(엘렌 로버츠 저)>과 책에 나온 추천 도서를 찾아 읽으며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글을 보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왜 이런 책들을 미리 읽어보지 않았나 후회하고 있다.
첫 책을 내고 거의 이 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그저 책을 또 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며칠 전 읽은 <더 해빙 The Having(이서윤, 홍주연 저)>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집착한다는 것이다. <더 해빙>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있음'을 충분히 느끼고 지금에 충실한 것이다. 하지만 '집착', '간절함'은 '없음'에 집중하는 것이다. '결핍'에 초점을 맞추니 마음이 편안할 수 없다. 그래서 원하는 미래가 점점 더 멀리 느껴지는 것이다.
그동안 나의 모습도 그랬다. 나는 어디 가서 작가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했다. 책을 쓰고 있지 않아서였다. 작가라 말하기 위해서라도 책을 낼 기회만 노렸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갔다. 출간 제안이 들어왔을 때라도 그림책 공부를 하고 준비를 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책을 출판한다는 확신이 없었고, 계약서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없음'에만 집착했기에 기회가 찾아와도 초조했다.
나는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능력에 충분히 감사해하고 기회는 당연히 찾아올 것이라 믿으면 되었다. 아니, 이미 가능성은 내 안에 있음을 인식하고 준비만 착실히 하면 되었다. 내 글이 재밌나, 내가 글을 잘 쓰나? 이런 걱정은 내가 노력했다면 불필요한 질문들이었다. 확신은 그런 오랜 수고 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불안은 결국 내가 작가로서 소명 의식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쓴다면 출판사의 대답에 전전긍긍하며 내 일상이 동요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만이 이 글을 쓸 수 있는데 그 글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출판사의 손해일뿐이다.
이런 깨달음에 이르자 그냥 날려 보낸 시간이 아쉬워졌다. 하지만 내게 아직 시간이 '있다'는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시간이 있고, 글 쓸 능력이 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란 내가 지난 상담들을 통해 내내 얘기해왔던 것들이다. "너는 있는 그대로 이미 충분한 존재다", 내가 어린 시절 듣고 싶었고 들어야 했던 그 말을 이제 내가 어린 친구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루에 질문 하나씩 적혀 있는 오 년짜리 다이어리를 오늘 몇 달만에 펼쳐 보았다. 10월 8일. 질문은 이것이다.
'나의 가장 큰 꿈은 무엇인가?'
쉬운 질문인 것 같지만 답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했다. 나의 대답은 '멋진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재능을 세상을 위해 남김없이 쓰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이 소명대로 사는 삶이 아닌가 싶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그리고 이 글을 쓴 후에 들어갈 그림책 작업도 모두 다 내 소명이다. 소명을 인식하니 내 일상도 다시 안정을 찾고 나 역시 편안해짐을 느낀다. 소명이 있음에 감사하다.
상담이 다시 시작되면 형님과 소명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