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만 Aug 19. 2020

부지런한 사랑을 하겠습니다

오만의 마음치유 일기 12 -  새로운 이야기의 저자


썼던 글을 지웠다. 누군가는 보아선 안 되는 글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 작가는 사건을 재구성한다. 주관적 진실에 가까운 글을 쓰려 노력하지만 그것이 객관적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럴 때 작가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대학생 때 유명 개그우먼의 특강을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오자 나는 평소 고민했던 부분에 대해 질문하려 손을 들었다. 당시엔 1박 2일, 무한도전, 아빠 어디 가 등 온통 남성 출연자 위주의 예능이 주를 이뤘다. 주말 공중파 예능에 고정 출연하는 여자 연예인이라고는 런닝맨의 송지효가 전부라는 말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여성 예능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나는 이런 방송 환경 속에서 여성 예능인으로서 그녀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묻고자 했다. 하지만 내 질문이 이런 현상의 원인을 여성 개인의 역량 탓으로 돌리는 것처럼 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불합리한 환경일지라도 그것을 타개하고자 하는 그녀들의 태도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 적절한 단어와 어미 선택을 하지 못해 말을 버벅거렸다. 그러자 그 개그우먼은 '교환 학생이냐, 한국말을 못 하냐' 등의 농담을 했고 강연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이후로 나는 종결어미까지 완벽하게 구상하지 않고서는 오픈된 장소에서 질문하지 않았다.


이런 비슷한 일은 너무도 흔하다. 공개 코미디 현장에서 특정 관객의 외모를 비하하여 웃음을 유도하는 행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불편했다. 웃음거리가 된 관객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상처 받았을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코미디 프로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그런 코미디를 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인가? 대학생 때 만났던 그 개그우먼에 대해 얘기하자면 나는 여전히 그녀가 착한 사람이라 믿고 있다. 개인적 호감도와는 별개로 방송에 소개된 몇몇 일화는 그녀가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공개 코미디 프로에서 관객을 모독하며 웃음을 만들어내던 코미디언들 역시 그렇다. 그들이 하는 코미디와 코미디언 개개인의 인성은 다른 문제다. 그렇기에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 해서 그들의 개그 역시 좋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게으른 개그'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끌어내리지 않고서는 웃길 수 없는가? 분명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더 치열하게 웃음을 공부했어야 했다.


이슬아 작가는 작가를 '부지런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 했다. 김영하 작가는 '존재의 이름을 아는 자'라고 했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 창작자가 되려는 사람은 항상 부지런한 시선으로 주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인이 된 후 내가 겪은 가장 수치스러운 경험 중 하나는 어느 망한 영화 촬영 현장에서였다. 연출자는 원하는 이미지를 혼자 가지고만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조연출이었던 나는 그런 연출가에 대한 신뢰가 바닥난 상태였고, 현장에서 한 번도 온전히 그의 편이 되어 주지 못했다. 촬영이 끝났지만 이게 영화가 될 수 있을지, 장면이 붙을지 모두가 의심했다. 촬영 감독은 본인 자재만 챙겨 급히 현장을 떠나버렸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조명 감독은 나를 따로 불렀다. 그는 내게 '영화가 정말 하고 싶냐'라고 물었다.  '영화를 하려면 공부를 더 하고 오라'고 했다. 그게 내 마지막 현장이었다. 그때 느낀 부끄러움은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다. 그리고 그분 역시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영화에 매진했지만 얼마 후 태어날 아이를 위해 영화 현장을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그만큼 간절한 분에게 나는 존재만으로도 모욕감을 줬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나의 무지와 현장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얼마나 그 일이 하고 싶은지와는 관계없이 그 직업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나는 좀 더 부지런하게 공부했어야 했다. 영화를 하고 싶다면 그랬어야 했다.


썼던 글을 지웠다. 그 글의 문제의식에는 여전히 동의한다. 그래서 그 글이 아직도 조금은 아깝다. 하지만 내 방법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글을 지웠다. 명절과 제사를 지내며 느낀 내 존재 의식의 문제를 시댁의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표현해선 안 됐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시댁 어른들이 보아도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글을 썼어야 했다. 내 글로 무언가를 바꾸고자 했다면 그럴 만한 글을 써야 했다.


심리 치료에 관한 책을 읽는 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심리 치료자는 내담자에게 현재 이야기의 편집자로 머물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의 저자가 되는 길을 가르치고자 한다.(루이스 코졸리노, '심리치료의 비밀' 中)"

글을 쓰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는 결국 심리 치료자가 하는 일을 해야 한다.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은 현실의 편집자가 아닌 새로운 이야기의 저자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꺼려지는 그런 글이 아니라 새롭고 공감 가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 부지런하게 사랑해야 한다.


이전 14화 살아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