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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만 Jul 16. 2020

세상을 잇는 글쓰기

오만의 마음치유 일기 9-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


"이번 주는 어떻게 지냈어요?"


안부를 물어주니 참 고맙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요즘엔 내게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 모두들 내가 '무엇을' 하는지만 궁금한 것 같다. 가끔 오랜만에 연락해 '잘 지냈어?'라고 묻는 친구들이 있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응. 잘 지냈어' 외에는 없다. 하지만 자주 만나는 사이에서 이렇게 안부를 물어오면 입이 절로 열린다.


"격동의 한 주였어요."

"브런치에 글 올린 거 봤어요. 놀랍게도 그 격동이 글에 오롯이 드러나던대요?"


상담사인 형님이 언급한 그 글에 적힌 사연은 이렇다. '책모임 카페에서 어떤 남성 회원이 여성을 비하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나는 젠더 감수성에 대한 글로 응수했고, 수많은 동조자들을 얻었으나 동시에 공격해오는 이도 만났다.' 그때 느낀 혼란스러움이 아마도 지난번 글에 묻어 있었나 보다.


"그럼 지금 감정을 그림으로 한 번 표현해볼래요?"


 

지금 무엇을 느끼시나요?


나는 빨간 물감을 손에 발라 종이에 찍어냈고, 검은색 눈을 크게 그려 넣었다. 뒤쪽으로는 창문 뒤에 숨어 바깥을 바라보는 눈을 그렸다.


"손을 찍은 건 자기 정체성을 표현한 건가요?"


"음.. 살려달라는 의미예요. '나 좀 도와줘' 같은... 그런데 '나 여기 있어'의 느낌도 있으니까 정체성 표현도 어느 정도는 맞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눈은 나를 감시하는 눈이에요. 타인의 눈이자 제 자신의 눈이죠. 검열하는 눈. 저는 창 뒤에 있어요. 바깥이 궁금하지만 두려워서 흘깃거릴 뿐이에요."


의도하지 않고 그저 손 가는 대로 그린 것이지만 설명을 하면서 오히려 그 감정이 분명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지난주의 그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비난했던 사람의 말은 호응은커녕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흔들렸다.


그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젠더 감수성에 대해 쓴 그 글을 좀 더 자신 있게 발표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내가 남자여도 그런 성차별적인 글에 그렇게까지 분노하고 펜을 들 수 있었을까 하는 반문도 해보았다.


끝내 진실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많은 여성 회원들을 탈퇴하게 만든 그 논란의 글을 남편과 친오빠에게 보여줬을 때, 둘의 공통된 반응은 이랬다.


"이런 놈들은 세상 어디든 있어. 화는 나지만 딱히 내가 여기에 반응해서 그들과 얽히게 하고 싶진 않아."


함께 분노하고 행동해주길 바랐기에 그들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글을 올린 후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과 만약 침묵했다면 받지 않았을 몇몇의 적의를 생각해봤을 때 그들의 그런 자세가 좀 더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이런 문제에 저렇게 태연하게 반응하는 남편과 오빠가 못마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부럽기까지 했다.


한국계 미국인 여배우 '산드라 오'가 최근 한 인터뷰는 내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오스카를 '지역(local)' 시상식이라 칭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조차 늘 당당했던 봉준호 감독을 보며 그녀는 너무나 놀라웠다고 말했다. 평생을 미국과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동양인 여자'라는 이름표를 스스로 각인시키며 살아와야 했던 그녀에게 한 번도 소수 인종으로 살아본 적 없던 봉 감독의 태도는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줬다.


"봉 감독님은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는 자기가 불리한 상태에 있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신선하면서 또 부러웠을 것이다.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의 틀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여성'으로서의 나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찍던 시절, 성 소수자 감독은 왜 성 소수자 문제를 다룬 영화만 찍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안타까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들이 성 소수자라는 정체성에서 조금만 벗어난다면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서 어느 정도 빗겨 날 수만 있다면, 여성으로서 느끼는 피해의식을 떨쳐내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그때 내가 푸념하고 있는 것을 들은 어느 미술 하는 동생이 이렇게 말했다.


"언니, 나는 한 사람이 여러 관심사를 다룰 수 있는 것보다 성소수자 감독이 성소수자 영화를 만들고, 여성이 여성 영화를 만들고, 노동자가 노동자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더 진실된 다양성에 가깝다고 봐. 사회적 다양성이란 각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마구 벗어던질 때가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고 마음껏 표현할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던 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난 왜 또 고민하고 있을까.


"가영 씨는 정치적인 글을 쓰는 데 왜 부담을 느끼나요? 그런 게 예술가가 하는 일 아닌가요?"


형님은 내게 메리 파이퍼의 책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을 추천해 주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예술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에겐 구원 같은 책이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그것(I-it)'과 '나와 너'의 관계를 구분했다.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피상적으로 다룬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목적을 돕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은행원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돈을 내주는 사람일 뿐 그 존재는 무시된다. 오래된 숲은 벌목을 기다리는 목재다. 하지만 '나와 너' 관계로 옮겨간 은행원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욕망이 있고, 꿈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존재다. 오래된 숲은 목재를 넘어 그보다 훨씬 큰 목적을 지닌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봐야 우리 마음에 비로소 은행원이나 숲을 향한 존중심이 생겨난다. '나'와 '너'가 '우리'의 관계로 진입한다.


연결되면 책임감이 생긴다. (...) 우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꼬리표를 달면 그들의 인간성을 무시할 수 있다. 그럴 수 없도록 우리와 그들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것이 작가로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 가운데 하나다. 그들의 역사, 그들의 가족, 그들의 감정, 그들의 정당한 요구 등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복잡한 인간인지 보여주는 이야기를 만들어 독자와 지구 상의 모든 이들을 연결해야 한다. 우리는 1차원의 전형적 인물을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다차원의 개인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나와 너' 관계로 이어지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작가는 막중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좋은 글은 사람을 다른 사람, 다른 생명, 이야기, 아이디어, 행동과 연결시킨다. 독자가 세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해 준다. 작가는 늘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경험을 했나요?' 작가는 듣고, 관찰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운 것을 글로 공유한다. 세상을 잇는 글쓰기는 공감 훈련에 다름 아니다. '공감은 가장 혁명적인 감정'이다.
세상을 잇는 글쓰기는 '변화를 일구는 글쓰기'로, 훌륭한 심리치료처럼 사람들이 변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낸다. (...) 심리학자 도널드 마이켄바움은 심리학자를 '희망 공급자'라고 정의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글을 쓰는 작가도 역시 희망 공급자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이 있다. 상처를 받아본 자만이 진정한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상처 입은 치유자다. 나에게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예술가로서 소명이 있다. 상처 받은 이들을 치유하고 그들이 더 이상 '상처 받은 이'라는 전형적인 인물에서 벗어나 또 다른 '치유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을 '그것(it)'이 아닌 '너'이자 '우리'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소설가 바바로 킹솔버는 말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은 훌륭한 연장처럼 자신의 쓸모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는 상처 받은 자이기 때문에 상처 받은 이들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나는 여성이기에 여성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쓸모이다.

앞으로 나는 공감과 연대 의식을 갖고 나의 쓸모의 범위를 넓혀 나갈 것이다. 성 소수자, 저임금 노동자, 다문화 가정 등 우리가 '그것(it)'으로 구분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로 연결시킬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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