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만 Aug 03. 2020

내가 나를 대접할 때

오만의 마음치유 일기 10 - 신체 에너지를 늘리기 위한 방법



문자를 한통 받았다. 그동안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심리 치료사인 형님이 입원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몇 달간 마음 치유 수업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올 상반기 코로나로 인해 삼 개월 정도 수업이 연기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직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정체되었을 거야'라는 자학적 자기 위안만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기를 바랐다. 그동안 나누고 공부했던 것들로 내 마음을 직접 보살피고 성장시키기로 다짐했다.


오늘의 글은 일종의 출사표로 혼자서도 발전해 나가기 위한 자신과의 약속에 대한 글이다. 그 약속이란 바로 '적게 먹기'이다. 마음을 살피는 것과 적게 먹는 것이 무슨 상관일까 의아해 할 수 있다. 재밌게도 '돈의 속성'을 쓴 세계적인 기업가 김승호 회장도 운을 바꾸기 위해서는 음식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책에서 음식 양을 줄이라는 이야기를 하다니, 본문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은 음식을 줄이며 절대로 배가 부르게 먹지 말고 진하고 거친 음식을 멀리하고 일정하게만 먹어도 다시 운이 돌아온다. 식사를 제대로 정해진 시간에 하려면 생활이 일정하고 불필요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시작이다. 그러면 몸이 가벼워지고 운동을 하고 싶어 지며 걷고 움직이다 보면 생각이 맑아진다. 그제야 비로소 욕심과 욕망을 구분할 줄 알게 되고 들고날 때가 보인다. (...) 이때부터는 모든 것이 잘 풀리고 건강도 재물도 인연도 얻게 된다. (p55)


음식을 줄이면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일이 잘 풀린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를 깨달은 사람들은 이미 것을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적게 먹기'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나를 대접하는 일'이다.


얼마 전, 내가 느낀 마음의 풍요를 남들과 나누는 사업에 대해 형님과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이 일이 어떤 사명을 띠고 있는지를 논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일의 필요성을 인지함에도 내가 주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까, 일만 벌이고 제대로 해 나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충동적인 생각에 휘둘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형님은 언제 그런 생각이 드는지를 물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몸이 너무 피곤했거든요."

"그러니까 가영 씨는 신체적 에너지가 떨어질 때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행동을 망설이는군요. 그러면 신체적 에너지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죠."


그 방법에 대해 떠오르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운동!


"운동을 해야 돼요. 운동을 해야 되는데..."


운동해야 되는데... 거의 입에 달고 사는 말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면 운동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무엇인들 할 수 있을까 하는 죄책감과 좌절감에 시달린다. 운동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알찬 하루와 운동조차 하지 못 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비참한 하루로 그 날의 가치가 결정된다.


"가영 씨에겐 이미 운동이 짐이 되어버렸네요. 오히려 운동이 신체 에너지를 잡아먹는데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라도 가영씨가 꼭 하게 되는 건 뭐가 있어요? 다른 건 안 해도 이것만은 한다, 하는 것."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밥은 먹나요?"

"네. 밥은 먹어요."

"그럼 밥을 먹는 건 가영 씨에게 신체 에너지를 주는 일이겠네요?"   

"잘 모르겠어요."

"음식을 먹는 게 가영 씨한테 중요한 건가요?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해지나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해 선뜻 한 가지 답을 내리긴 어렵다. 음식은 내게 늘 양가감정을 느끼게 한다. 누군가는 그저 살기 위해 먹을 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먹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고, 특히 맛있는 것을 먹을 때는 누구보다 깊이 반응한다.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든다. 폭식을 하고 나면 몸이 무거워지고 마음도 우울해져 무엇도 하기 싫어진다. 그러면 더 울적해지고 그 공허감을 음식으로 채우려 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러면 음식 먹을 때 언제가 즐겁나요?"

"맛있는 것 먹으러 갔을 때요. 분위기도 좋고. 대접받는 느낌이잖아요."


형님은 내가 한 말 중 '대접'이라는 단어를 찾아 크게 썼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을 때 행복하고 에너지가 솟는군요. 그러면 스스로에게 매일 그렇게 해주면 안 되나요? 음식 하나 먹을 때도 공들여 요리하고 예쁘게 담아서 조금만 먹는 거예요. 그러면 남한테 굳이 의존하지 않아도 신체 에너지가 커지겠죠? 앞으로 '운동해야 하는데' 같은 강박을 버리고 나 자신을 대접하면서 조금만 먹기. 그것부터 시작해 볼래요? "


돌이켜보면 나는 늘 남에게 대접받고 싶어 하면서도 나 스스로를 대접해주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 전 혼자 사는 십 년 동안은 편의점 음식이나 배달 음식으로 밥을 '때우기' 일수였고, 결혼해서도 남편을 위해 요리는 해도 나를 위해서는 하지 않았다. 요리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나를 위한' 요리에는 익숙지 않았던 터였다. 나는 나를 홀대하고 있었다. 나를 잔반 처리 요원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버리기 아까우니까, 일단 배를 채우려고 음식물 쓰레기가 될 것들을 내 몸에 채워 넣고 있었다. 나를 소중히 대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매번 요리해서 번듯하게 차려먹기란 쉽지 않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끼 정성 들여 예쁘게 플레이팅 할 순 없어도 마음을 그렇게 먹을 순 있죠. 대접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받는 마음으로 그것을 먹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한 번 더 나아가 볼까요? 가영 씨는 언어에 민감한 사람이니까 '대접하다'와 "대접받다"에 대해 더 생각해 봐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수수(授受)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대접을 해 줘야' 한다. 줘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제대로 받아야 또 줄 수 있다. 나는 대접받을 때 행복해졌다. 신체 에너지가 상승했다. 예전의 나는 대접을 주는 주체를 늘 남에게서 찾았다. 그러나 이제 내가 스스로를 대접해주고 받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이 주고받는 관계를 훨씬 더 넓힐 수도 있다. '봐준다', '들어준다', '읽어준다' 등등. 내가 봐주고, 들어주고, 읽어주면 그들도 다시 내게 돌려'줄' 것이다. 내가 그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아봐 주면' 그들은 내게 아름다워지고 가치로워질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처럼. 그렇게 되면 나는 근사하게 요리를 해서 멋지게 차려 먹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읽는 모든 행동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에너지가 충만하면 나는 포기하지 않고 내 사명을 이루며 살아갈 힘을 가지게 된다.


나에게 '적게 먹기'란 그런 의미다. 나를 낙담시키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작은 발걸음이다.


며칠 전 친구 하나가 "너는 요즘 무슨 운동해?"하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대접하며 먹는 일을 하고 있어. 그런 마음이 쌓이면 내 몸을 위해 운동도 하게 되지 않을까?"


아마, 그리고 확실히 그럴 것이다. 형님과 만나지 못하게 된 이 몇 달 동안 나를 대접하는 일을 먼저 시작해보려 한다. 세상 만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일을 하려 한다.

언젠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도 내가 봐주고 내가 생각해주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또다시 일어날 힘과 아름다움을 주고받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이전 12화 세상을 잇는 글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