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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진 Sep 19. 2019

교통사고가 났으면 좋겠다.

생방송 오늘 아침, 오늘 저녁, 생생정보통, VJ특공대. 세상의 이런 일이, 생활의 달인.
다들 한 번씩은 들어본 각 방송사의 간판 위클리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매 회 다양한 아이템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누구나 아는 프로그램들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정말 피와 살을 내주는 일과 다름이 없다.

방송작가의 가장 큰 업무 중 하나는 방송 아이템을 잡는 것이다. 맛집, 생활정보, 사건사고, 휴먼, 여행 등 큰 카테고리 안에서 세부 아이템을 결정한다. 아이템은 인터넷 기사로도 찾고, 신문 기사로도 찾고, 네이트 판이나 위즈넷 같은 커뮤니티에서도 찾는다. 무작정 전화해서 섭외를 하기도 하고 한 명의 연락처를 알아내기 위해서 수십 명의 사람에게 연결 연결해 전화를 걸기도 한다.

아이템이라는 게 한 번에 잡히면 좋으련만, 나는 단 한 번도 손쉽게 아이템을 잡은 적이 없다. 하루에서 수십 번, 많게는 백여 번의 섭외에도 실패할 때가 많았다. 아침 8시부터 섭외 전화를 해도 밤 10시까지 한 통의 회신 전화가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방송 날짜까지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아이템은 없지, 나 빼고 다른 작가들은 다 섭외에 성공했지, 그런 상황들이 닥치면 지옥이 따로 없다.

월화수까지는 메인작가님도 아이템 재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요일쯤 되면 슬슬 '아이템 없니?' '어떻게 되고 있니?'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만 그저 아무 대답도 해드릴 수 없을 때가 온다. 그러면 메인작가님도 같이 아이템을 찾기 시작하면서 기약 없는 야근이 시작된다.

시간은 흐르는데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교통사고가 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불의의 사고로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다쳐도 괜찮겠다. 아니다, 다리만 다치면 병원에 입원해서도 타자를 칠 수 있으니까 이왕이면 팔이 다쳐야겠다. 등등 오만가지 나쁜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워갔다. 그러다 보니 날이 갈수록 우울감이 심해졌고 그 우울감은 마음뿐 아니라 몸이 아파왔다. 수시로 장염과 위염에 걸렸고 역류성 식도염과 신경질이 늘었다. 막차가 끊겨 집까지 걸어가던 날, 빨간 불빛이 켜진 신호등 앞에서 엉엉 소리 내면서 눈물을 펑펑 쏟은 적도 있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무능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남들은 잘만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못할까, 왜 아직도 헤맬까 자책하며 울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던 말던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때였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지옥 같던 날들이었다.

이 증상이 나아진 건 당연히 아이템이 잡혔을 때였다. 아이템이라는 것이 신기한 게 그렇게 새로운 걸 찾아내려고 이를 바득바득 갈 때는 나타나지 않다가 포기할 때쯤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섭외에 응해줄 수 없다고 하던 출연자가 돌연 마음을 바꿔 출연에 응하거나 기적처럼 새로운 아이템을 선점할 때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아픔에서의 도피였을 뿐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되지 않았다. 매주 이 스트레스를 감당하면서 살 자신이 있느냐 물으면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었다. 방송은 아이템과의 싸움이었고 그 싸움에서 지면 내가 나가떨어지는 수밖에. 나는 결국 아침 생방송을 2년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그럼 이제 교통사고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어졌냐고 묻는다면, 아니. 그 생각은 방송작가를 하는 내내 나를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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