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희진 Mar 02. 2020

밤새는 것도 능력.

우리 엄마는 내가 방송작가 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셨다. 그 이유로는 간단히 말하면

1. 방송작가? 그게 무슨 일 하는 건데 

2. 방송작가들은 술 마시고 담배피면서 일하잖아 

3. 밤새고 집에 안 들어온다던데 

이외에도 자잘한 이유들이 많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위 세 가지였다. 


2008년 당시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생소하기도 했고 나도 확실하게 부모님께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설득하기 쉬웠던 건 딱 들었을 때 '있어 보이는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부정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으스될 일도 아니지만. 


그리고 술 마시고 담배 핀다는 건, 어느정도는 사실이다. 나도 술은 마시고 캔맥주에 빨대 꽂아서 마시면서 원고를 쓴 적도 많다. 담배는 워낙에 기호식품이고 좋다 나쁘다를 평가할 문제는 아니지만 부모님이 생각하기에는 기피 요소 중 하나로 충분히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비흡연자지만 흡연의 충동은 언제든 일어난다. 특히 스트레스가 많을 때는 담배를 피면 좀 나아지려나 싶고 실제로 담배를 빌렸지만 피지 못했던 적도 많았고. 


그런데 지금까지도 엄마를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3번이다. 밤새고 집에 안들어온다던데. 이건 정말 사실이라서 여전히 엄마가 싫어하고 잔소리하고 걱정하시는 부분이다. 내 생활을 곁에서 지켜보는 지인들도 가끔 궁금해하는 부분이니까. 잠은 자? 퇴근은 했어? 진짜 며칠씩 새는 거야? 과장 안보태고 밤새고 있다고 하는 건 진짜다. 


그나마 막내작가 때는 선배들의 배려로 막차를 타고 집에 가곤 했다. 그런데 자칫 원고 쓸 때 옆에 있어주길 원하는 선배를 만나면 할 일 없이 밤새 선배 옆에서 빈 모니터 화면만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가 많다. 그렇게 밤을 새도 어릴 떄라서 하루 정도는 거뜬히 샜다. 그런데 문제는 서브작가가 되면서부터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생생정보통을 할 때였는데 그 당시 작가팀은 메인작가님 1명, 서브작가 8명, 막내작가 2명의 꽤 큰 규모였다. 한 프로그램에 8개의 코너가 있었고 메인작가님은 그 코너 8개를 모두 총괄하는 역할을 하셨다. 각각 서브작가들은 자신이 맡은 코너를 피디와 정리하느라 이미 하루씩을 밤을 샌 상태였고, 그 과정에도 메인작가님이 붙어서 정리한다. 그리고 작가들이 각자 원고를 쓰면 그 원고도 메인작가님이 다 하나하나 검수하고 수정한다. 그 수정 작업만 해도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린다. 그러면 기본으로 이틀은 밤을 새야한다. 서브작가들은 자신의 원고를 넘기면 조금 쪽잠을 자거나 퇴근해서 씻고 다시 출근하거나 했는데 메인작가님은 제자리에서 삼일 연속 밤을 새셨다. 그것도 정말 한 잠도 안 주무시고. 3일씩 밤을 새면서도 모든 원고를 꼼꼼히 보시고, 조금이라도 잘못된 편집을 수정하고, 저녁 생방송까지 진행하셨다. 그 모습이 멋지다가도 독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다. 다들 그 메인작가님을 보면서 독하니까 저렇게 오래 방송 하는 거라고, 독하니까 인정 받는거라고 했었다. 난 그 때 알았다. 작가의 능력 중 하나는 밤을 잘 새야 된다는 것을. 


+) 잠깐 딴 애기를 하나 하자면, 밤새면 야근수당 줘?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거 없다. 4대보험도 들어있지 않은 방송작가들에게 야근수당은 평생 들을 수 없는 단어다. 야근수당 제도가 있었으면 방송작가들 모두 부자 됐을 걸. 그리고 새벽에 택시타고 집에 간다고 해도 택시비 지원 안된다. 그냥 다 개인의 몫이다. 


밤을 잘 새려면 체력이 받쳐줘야 했다. 그래서 매일 10시, 11시 퇴근해도 한강에서 자전거를 탔고 문 닫기 한 시간 전인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곤 했었다. 영등포에서 광명 집까지 걸어다니기도 했고, 따릉이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나 걸어서 가나, 따릉이를 타나 크게 시간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있지만. 그래서 다른 작가들보다 체력도 좋았고 밤도 잘 샐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내일의 체력을 오늘로 당겨쓴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다. 


지금 하는 프로그램도 꽤 자주 밤을 새는 편이다. 해외 촬영을 보내고 피디님이 돌아오면 봐야할 촬영본이 최소 100시간에서 150시간에 육박한다. 그리고 촬영 카메라가 3대 이기 때문에 그 모든 촬영본을 보려면 2배속, 5배속으로 봐도 며칠이 꼬박 걸린다. 그 촬영본을 다 보고 편집 흐름을 짜고, 중요 오디오는 프리뷰본으로 체크해서 따로 정리해놓아야 한다. 그걸로 최소 2-3일을 새고 피디님이 가편집을 하면 이틀정도는 붙어서 밤새 같이편집 수정을 한다. 그렇게 시사를 하고 또 하루 정도를 더 밤을 샌다. 밤을 새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으면 라꾸라꾸(간이식 침대)에 몸을 뉘이지만 그건 종일 꼿꼿하게 서 있던 허리를 잠시 펴줄 뿐, 완벽한 대안책이 되지 못한다. 그마저도 누워있는 내내 머릿 속에 영상이 둥둥 떠다녀서 제대로 자지도 못한다. 그렇게 완성된 가편을 받으면 2-3일간 원고를 쓴다. 다행히 원고를 쓸 땐 집에서 쓰기 때문에 정 원고가 안 풀리면 자고 일어나서 다시 쓰고 안 풀리면 자고 일어나고를 반복한다. 이걸 2주일에 한 번씩 루틴처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쓰면서도 숨막힌다) 


그렇게 내일의 체력을 오늘로 끌어쓰기 시작하면서 최근 내 체력도 다시 최악으로 떨어졌다. 저렇게 2주의 루틴을 끝내고 더빙까지 하고 나면 주말 내내 앓고 있다. 이번 주말에는 무려 16시간을 내리 깨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다음 날에는 새벽 4시까지 못자기도 한다. 이런 엉망진창 루틴으로 살다보니 체력이 곤두박질쳤다. 헬스장에서 두 시간씩 운동해도 거뜬 없던 몸은 이제 40분만 채워도 한계가 온다. 떨어진 기초체력을 다시 올리는 건 내 나이에 너무 오래 걸리고 힘들다. 그래도 또 밤을 새려면 운동을 해야지. 요즘은 헬스장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운동해야하지만 안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밤을 잘 새는 게 능력이라고 여겼지만 그 또한 나를 갉아먹고 있는 강박 중 하나라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능력을 얻는 대신, 그저 내가 건강하고 싶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건강하고 싶은 욕심은 있으니까. 

이전 09화 교통사고가 났으면 좋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