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부터 숙소를 나와 바티칸으로 향했다. 바티칸 박물관 줄이 정말 길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도 줄이 없었다. 이런 날에 오면 사전예약비 4유로를 낼 필요가 없어보였다. (바티칸 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한 예약시 입장료 17유로 외에 사전예약비 4유로를 더 내야한다) 관광 비수기인 겨울철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오후보다 오전이 사람이 적기도 하고, 또 오늘이 교황님 미사가 있는 수요일 오전이라서 그렇단다. 그럼에도 곳곳에 단체관광객들이 쉽게 눈에 띈다.
바티칸 박물관은 규모 자체가 웅장하고, 화려한 작품들로 가득차 있어 보는 곳마다 탄성을 자아낸다. 다만 그 규모가 커 전문 가이드나 오디오 가이드(한국어 가이드도 제공하며 대여 비용 7유로다) 없이는 효율적으로 관람하기 힘든 곳이다. 나와 사촌동생은 미리 인터넷에서 바티칸 가이드를 다운로드 받아 이를 통해 관람했다. 작품과 맞지 않은 것도 종종 있었지만 효율적이면서도 자유롭게 관람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무료다!
아테네 학당을 배경으로 티켓 사진도 찍고, 잠시 여유를 부리며 케이크와 차도 마시고, 바깥 풍경도 구경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침부터 바티칸을 관람했다. 걸작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박물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케이크는 달콤하고, 라떼는 부드럽고, 날씨는 좋고 하늘은 맑았다.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 조금 지나있었다.
무엇을 먹을까 잠시 고민을 하다 바티칸 박물관 근처 한국인 맛집이라는 리카를 찾았다. 역시 한국인들이 많았다. 가이드와 함께 온 단체관광객이 한 팀, 다른 테이블에도 개인적으로 온 관광객 두 명이 있었다. 둘이 합쳐 한 40~50유로 정도 나왔는데 파스타와 피자의 본고장이라는 이탈리아에서의 피자, 파스타는 한국에서 먹는 것만 못했다.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스타일과 이탈리아에서 선호되는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점심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올드브릿지 젤라또에서 젤라또를 먹기로 했다. 리카나, 올드브릿지나 둘 다 찾기 쉬웠다.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라 그런지 점원이 서툰 한국어로 몇 마디 말을 한다.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어는 늘 반갑다. 디저트를 좋아하는 사촌 동생은 나보다 한 사이즈 큰 아이스크림을 시켰고, 올드브릿지에는 앉아서 먹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근처 벤치에서 앉아서 젤라또를 먹었다. 날씨는 쌀쌀하지만 우리 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과 젤라또의 달콤함이 어우러져 충분히 즐겁다. 이탈리아에서는 1일 1젤라또라던데! 매일 실천할 수 있을까?
젤라또로 무언가 허전했던 것을 든든하게 채우고, 시간 여유가 있어 도보로 1시간 거리인 숙소에 걸어가기로 했다. 분명 올 때 버스를 타고 보았던 길인데도, 그와는 다른 속도로 걸어가다보니 역시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늦은 오후 테베레 강 다리를 건너니 괜시리 감상적이 된다. 가는 길에 또 장난감 가게도 들려보고 나보나 광장에서 사람들도 구경하다 숙소로 돌아갔다. 몸은 고단하지만, 여행은 역시 여행이다.
(바티칸시국)
인구 1,000여 명인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그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 한다. 출산율이 무려 0%라고 한다! 늘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수요일 오전과 일요일 오전에 교황님 미사가 있어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기 때문에 조금 더 여유 있게 관람할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미리 예매해둔 이탈로를 타고 피렌체로 향한다. 아쉽게도 비가 온다. 기대했던 만큼 맑은 날씨는 아니지만 비오는 피렌체도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 하루밖에 안되는 짧은 일정이기에 우피치 미술관은 포기하기로 하고 두오모로 향했다. 역에서 내려 두오모로 가는 길에 결국 우산 두 개를 샀다. 하나에 5유로하는 무지개색 우산을 두 개.
이탈리아에는 행상이 많다. 비오는 날이면 거리 곳곳에 우산을 파는 사람들을, 날씨가 쌀쌀할 때면 숄을 판다. 마치 졸업식 날 학교 근처에서 꽃을 파는 사람들 같다. 물품도 같고 종류도 같다. 이게 완전경쟁시장인가 하며 괜히 경제학에서 배운 개념을 떠올려보다 피식 웃었다.
바로 두오모로 이동해 별 생각없이 큐폴라 줄을 섰다가 예약이 필요하다는 말에 돌아가서 다시 예약을 했다. 그동안 두오모 박물관을 함께 관람한다. 솔직히 가이드 없이는 박물관에 가도 감흥이 없다. 내가 가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니 영문 설명이 있어도 짧은 식견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쉬울 따름이다. 무미건조하게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시간이 되어 다시 두오모 큐폴라로 향했다.
숨을 가쁘게 쉬어가며,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좁고 어두운 수백 개의 계단이 마치 중세시대 감옥으로 올라가는 길같기도 하고 어느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피렌체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보인다. 보는 사람마다 탄성을 자아낸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에서 남녀주인공이 재회한 장소로 이곳이 더욱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과 꼭 함께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그런 감상을 뒤로 하며 다시 수백 개의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달오스떼에 가서 런치 세트를 먹었다.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티본 스테이크 집인 '트라토리아 마리오'를 뒤로하고, 이 곳을 온 이유는 방문의 용이성이라든가 무난함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달오스떼에서는 스테이크와 와인, 샐러드를 비교적 저렴한 20유로에 즐길 수 있었다. 가격도 착하고 맛도 있어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사촌동생도 그런 것 같았다. 식사를 하고 피렌체 가죽시장과 장난감가게, 거리를 즐기다보니 거짓말처럼 금새 시간이 갔다. 섣불리 로마에 숙소를 다 잡지 말고 피렌체에 몇 박은 머무르면 좋았을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다시 로마로 향했다. 다음에 꼭, 꼭 다시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