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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율 Aug 29. 2020

에리 못 뒤집는 사람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에리(옷깃)의 중요도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사모님의 말을 빌리자면 에리는 셔츠의 생명과도 같다는 것이다. 에리가 살아야 셔츠의 '본새'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사실 아직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왜 에리가 멋져야 셔츠가 멋있어 보이는지, 잘 빠진 에리의 기준은 무엇인지. 에리의 둥근 코를 다듬고 뒤집으면서도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 에리가 중요하다는 엄마에게 ‘누가 그런 말을 해?’라고 되물었다가 혼이 난 적이 있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에리 만드는 것에 집중한다. 에리 만들기는 크게 차이나 에리와 양쪽 둥근 코의 에리를 만드는 것으로 나뉘는데, 그 과정에는 아이론(다리미)을 사용하기 때문에 나는 은근히 에리를 피해 다른 일로 도망가고 싶어 진다.


  “손가락을 끝부분에 넣고 이렇게… 손목을 이용해서… 착! 뒤집어야 해.”

  “…….”

  “뭐해, 한번 해봐.”


  다시 한번 말하면 엄마는 36년 차 미싱사다. 공장에서 그녀는 모르는 일도, 못 하는 일도 없다. 하지만 난, 그냥 나다. 아무리 엄마가 시범을 보여도 내가 할 땐 안감이 제대로 숨겨 뒤집히지 않아서 나는 코를 뒤집을 때마다 무딘 송곳(날카로운 쇠붙이!)이나 뜨개용 바늘로 끝을 빼가며 에리를 만들었다.


  단순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아니면 내가 딴생각에 쉽게 집중하는 사람이거나. 에리, 카우스, 어깨끈 등 옷의 각 부분을 작업할 때마다 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에 곧잘 빠지곤 했다. 특히, 에리를 만들 때가 그랬다. 나는 나를 스쳐 지나갔거나 스쳐 지나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했던, 혹은 내가 나에게 했던 되돌릴 수 없는 실수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금방이라도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어 진다. 지금 당장 에리 코를 잘 뒤집고 말고는 문제도 아니다.




  우선 술에 취한 이야기들이 있다. 나는 술이 센 편이다. 웬만하면 술에 취할 일이 별로 없어 술에 취해 큰 실수를 하는 경우가 손에 꼽는데, 2019년 내 서른 번째 생일파티 겸 <살아있는 게 기특한 사람>(2019, 독립출판물) 발간 기념회만 해도 그렇다. 와인과 보드카를 섞어 쉬지 않고 마시던 그 날, 나는 결국 이른 저녁부터 필름이 끊겨 초대한 친구들을 당황하게 했다. 끊임없이 토한다던지 넘어진다던지 화장실에서 잔다던지 했다. 나는 서른이 되면 주변에서 말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나의 품위 정도는 지킬 줄 알았는데 서른도 술 앞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미처 지우지 못한 화장을 지우며 나는 서른이란 뭘까, 생각했다. 그날 이후 숙취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술 먹는 횟수가 정말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어졌는데, 친구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니야. 넌 일생에 걸쳐 마실 술을 20대에 다 마셔서 지금 적게 먹는 것뿐이야.”


  라고 단호하게 말하기에, 내가 술 때문에 실수한 것이 (내 생각과는 다르게) 허다하게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선배 집에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다음 날 아침 비행기를 씻지도 못한 채 탄 일이라던지, 지금은 퇴사한 회사 입사 환영식에서 상사의 술을 받자마자 바닥에 술을 버려버린다던지 하는 일들. 내가 평생 품위라는 것을 알고 지낼 날이 올까 싶은 기억들이 하나둘씩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고 후회에 대한 것이 있다. 가장 뼈아픈 후회는 아픈 이모를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다. 병을 앓다가 스스로 생을 끊어버린 이모는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따르던 친척이었다. 엄마는 여덟 자매 중 넷째다. 이모는 외조부모의 일곱 번째 딸로, 언제나 상냥하고 애교가 있는 편이어서 어린 나에게도 늘 다정하게 대했다. 다른 이모들은 억센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날 대했기에 낯을 많이 가리고 소심했던 나는 그들을 대하는 게 너무 어려웠는데 그 이모만은 달랐다. 내가 어릴 때, 우리가 몇 년 함께 살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 곳이 아린다. 나는 이모에게 다정함을 배웠지만, 미처 그걸 가르쳐준 이모에게 내가 다정한 마음으로 보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늘 후회하고 후회할 것이다. 이모는 나의 그런 마음을 원치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에리를 뒤집으며 나는 들키지 않고 눈물을 훔친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 있는 이야기인데,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비는 타인의 평안을 위한 기도는 신이 기꺼이 들어준다고 한다. 나는 그 이후로 이모의 평안을 좀 더, 자주 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주 떠올리는 생각엔, 여전히 내 마음 한 곳에 잠들어있는 죽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외래진료를 받고 약을 먹고 있지만, 감정의 기복은 때때로 날 덮친다. 이건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란 걸 잘 알고 있다. 시간을 갖고 치료에 전념할 수밖엔 없다. 나는 누구보다 죽음이란 존재와 아주 가까이 붙어 오랜 기간 살아와서 그런지 지금도 아주 조금은, 삶의 어떠한 방법 하나가 영영 닫혀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 문 앞에 입장 불가 테이프가 붙여져 있는 기분이다. 내 손으로 이제 그 테이프를 뜯을 수 없기를 바라지만 가끔은 외로울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죽음과 나는 뗄 수 없는 단짝 친구였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날 때면, 어느 술자리에서 나에게 마흔 살까지는 그런 아쉬움 없이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지인의 목소리가 느리게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나는 에리를 뒤집으며 안감을 꼼꼼히 숨긴다. 누구나 나처럼 창피하고 괴로운 이야기를 하나씩은 감추고 드러내며 살아간다. 아마 모두 그렇다고, 그렇기에 그들 모두 나처럼 에리를 뒤집는 순간엔 이상한 상념에 빠진 채 나만의 안감을 함께 숨겨버리고 싶을 것이라고 믿는다. 에리를 뒤집으며 하는 생각들이야말로 스스로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끔 해주는, 나의 ‘본새’를 살아나게 하는 중요한 상념이 아닐까 생각한다. 혹시라도 내가 딴생각에 빠져 일을 하는 걸 들키는 날엔 이렇게 변명하기로, 나는 다짐한다.


  어느새 안감을 다 숨기고 나면 에리가 완성된다. 내 일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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