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애플 (THORNAPPLE) - 로마네스크
고등학교 졸업반과 대학 신입생 무렵, 나는 적당히 친한 동기들에게 뜬금없이 ‘나의 장점’에 대해서 물어보곤 했다. 친구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수하게 “너는 밝아서, 긍정적이어서, 웃는 게 예뻐서” 등의 좋은 말들을 해주었다. 모순적이게도 그 말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내가 아는 나는 밝지도, 긍정적이지도, 웃는 게 예쁘지도 않으니까.
심리상담을 자체 종료하고서 나는 그럭저럭 삶을 영위해 갔다. 어떻게 하겠는가,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여전히 돈을 벌고 별 수 없이 가족들과 부대껴야지. 대신 상담 선생님이 찾지 못한 해답을 찾아내기 위해 나의 역사에 조금 더 매달렸다. 무엇이 나를 이 지경까지 이끌었는지. 분명 내 인생에는 여러 힌트들이 포진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 알면서도 모른 척해왔던 것들을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하나의 질병을 일으키는 것에는 여러 가지 환경적, 태생적, 블라블라의 알 수 없는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감기만 해도 그렇다. 먼지가 염증 반응을 일으켰을 수도, 바이러스가 함께 들어왔을 수도, 하필 면역력이 떨어졌거나 알레르기를 앓고 있었는데 발전된 걸 수도 있다. 나의 우울도 다양한 내 기질과 사회적 환경, 주변 자극의 수용과 신체의 컨디션 등등 알 수 없는 레시피로 조합되어 나온 결과물일 것이었다. 마치 스위스 치즈 이론 같이. 송송 뚫린 구멍이 하나라도 중첩되지 않았으면 됐는데, 우연에 필연이 겹쳐 지금의 내 모습이 되었을 테다.
나중엔 여러 다른 요인들을 발견해냈지만, 내가 가장 먼저 찾아낸 것들 중 하나는 뿌리 깊은 자기 불만족이었다. 나는 늘 '왜 더 잘하지 못할까?' '왜 더 예쁘지 못할까?' '왜 더 쿨하지 못할까?' 등의 생각에 둘러싸여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5학년 1반 장래 희망 게시판에 어린 철학자 마냥 ‘만족하는 나’라고 적었더랬다—반 친구들은 ‘과학자’ ‘선생님이 된 나’ 정도로 적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 엄마가 너는 어릴 적부터 이상했다는 예시를 들 때 사용하는 에피소드다. 세상은 똑똑하고 멋지고 선하기까지 한 사람들로 가득해 보였고, 그 사이에서 나는 혼자 빛나지 못하는 돌멩이 같았다. 남에게는 후하고 나에게는 박한 인생의 시작은 그때부터였을지도. 스스로가 싫어질 땐, 내가 아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빛을 굳이 그 옆에서 퇴색되는 나를 통해 재확인하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못난 생각의 발로였다.
태양이 지구에서 멀어지는 시기가 있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가 멀게 느껴지는 시기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꽤나 자주. 그럴 때 이불속으로 숨는 것과 함께 종종 내가 택했던 길은 원래 알던 친구들과 자주 교류하는 대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이었다. 완전히 다른 커뮤니티에 들어가거나 단발적인 모임에 참석하면 나는 새로운 페르소나 속으로 숨을 수 있었다. ‘왜 요즘 말수가 적어졌어?’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었고, 마음대로 옷을 입어도 ‘웬일로 화려한 옷을 입었대?’라는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좋은 척을 할 수도 있고, 평소보다 더욱 못되게 굴어서 악명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다. 뒤늦게 온 사춘기를 앓았던 대학 새내기 시절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녀봤다.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느라 스스로의 늪에 침잠하고 있을 때엔 사교댄스 동호회에 가입했다. 하루하루 삶에 치이는 내가 싫어서 여유 있는 독서가인 척하고 싶었을 땐 충동적으로 북토크에 갔다가 뒤풀이까지 새벽 내내 앉아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일시적 자아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나자신에 만족했다. 새롭게 만난 사람들은 내가 만든 껍데기에 속아서인지 감사하게도 나를 좋아해 주었다. 하지만 이면을 다 아는 나만은 나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누가 나의 귀를 만지며 괜찮다고 등을 쓸어도' (쏜애플 (THORNAPPLE) - 로마네스크)
‘나는 날 좋아할 수가 없네.’ 노래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첫마디에 연달아 나오는 가사는 내 마음 그대로였다. 어째도 저째도 난 내가 싫다는 것.
친구가 공연에 데려가면서 빠지게 된 밴드 쏜애플의 곡들은 모두 가사가 좋다. 정확히 말하면 내 취향이다. 시적인 표현과 뒤틀린 화자. 격정적 연주들과 기타 리프, 높은 피치의 보컬이 불안한 정서를 증폭시킨다. 많은 곡들이 내 안에서 순위를 다투지만 들을 때마다 눈물샘을 건드리는 것은 ‘로마네스크’ 다. 이 곡에서는 세 차례의 자기부정 표현이 나온다. ‘누가 나의 귀를 만지며 괜찮다고 등을 쓸어도’ ‘누구 하나 잡을 수 없어 목을 놓다 잠든 밤에도’ ‘누가 나의 혀를 자르고 그저 곁에 있어준대도’ 스스로를 좋아할 수 없는 이야기. 화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가도 화자가 불행을 아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나는 세상에 혼자는 아니다. 그 속에 내가 내 속에 그가 있다.
여기 이 노래 속에 자기혐오를 거듭하며 양가적 감정을 표출하는 화자가 있어주었다. ‘날 좀 더 읽어내 줘요 아니 그냥 덮어줄래’ ‘날 좀 더 괴롭혀줘요 아니 그냥 안아줄래’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면 때로 이렇게 들리기도 한다. 네가 아무리 위로해도 내가 너무 싫어, 그래도 나를 사랑해 줘. 아냐, 상처 줄 거면 지나가.
이상하지 않은가? 드러난 양가감정을 끝까지 듣고 나면 첫 문장의 ‘나는 날 좋아할 수가 없네’가 그저 자기혐오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나에게는 이렇게 들린다. 나는 사실 내가 좋아, 좋아하는 사람인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슬퍼. 나는 날 좋아하고 싶어.
아무래도 나도 내가 슬펐던 것 같다. 좋아하고 싶은데 좋아할 수 없어서. 불만스러운 것도, 혐오스러운 것도 아니고 속상하고 슬픈 마음인 채로 오랜 시간을 묵혀왔던 것 같다. 그의 말속에 내가 있었고 나의 마음속에 그가 있었다. 함께 있어주었다. 내 곁에도 내가 있어주어야지라고 마음처럼 잘 안 되는 마음을 다독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