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아 - 도망가자
나는 도망의 귀재다.
정확히 말하면 도망치는 상상의 천재다. 무한한 상상력의 비결은 걱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의 선택을 할 때 나는 그 선택이 옳지 않았을 만일의 경우를 상상하기 때문이다. 상상력과 계획성, 그리고 약간의 고민을 더 하면 그전엔 보이지 않던 경로를 만들어낼 수 있다. 퇴각을 위한 경로, 나만의 퇴로. 때로는 아주 수월하고, 많은 경우 그 고민의 시간은 지난하다.
그래서 실제로 도망을 친 적이 많냐고? 내가 그렇게 비겁한 사람은 또 아니다. 책임감을 버리지 못하는 피곤한 성격도 한 몫했겠지만, 실제로 나의 도주를 막았던 건 ‘퇴로의 존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을 담갔다가도 금방 빼서 걸음을 돌릴 수 있는 퇴로가 생기면 나는 더 자신 있게 가던 길을 갈 수 있었다. ‘망해도 괜찮아, 다른 길이 버티고 있어, 여기에 모든 걸 걸어봐도 모든 게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야.’ 퇴로는 나에게 늘 속삭여주었다. 보이지 않는 지원군처럼. 그래서 나는 늘 나만의 퇴로, 조금 더 적나라하게는 나만의 개구멍을 만들며 살아왔다.
‘개구멍’은 대문 안에서 집을 지키던 개가 마을에 내려온 호랑이를 마주했을 때를 대비하여 조상들이 개를 위해 만들어둔 퇴로라고 한다. 개는 호랑이를 만나면 실컷 짖어서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자기 몸만 한 개구멍을 통해 들어가 숨거나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호환이 들이닥쳤을 때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존재가 누군가에겐 든든했으리라. 내게도 들이닥칠 위기를 덜 두려워하기 위해서, 실컷 짖기 위해서 개구멍이 필요했다. 언제든 어딘가로 도망칠 개구멍 포털의 지원에 힘입어 나는 두려움을 딛고 꿋꿋이 나아갈 수 있었다.
작게는 가족 모임 메뉴 선택부터, 여행 계획, 커리어 패스, 나아가 애정의 관계까지 나에겐 다양한 개구멍이 존재했다. 특히 사랑을 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내 뒤의 개구멍을 더듬었다.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나는 언제든 혼자가 되어도 괜찮아’를 속으로 되뇌었다. 사랑에 깊이 빠질수록 이 사람이 없어도 되는 이유를 더 열심히 찾았다. 거절당하거나 상처받을 것 같은 눈치가 있으면 재빨리 사랑 대신 다른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나는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이 아니라는 듯, 나에겐 더 중요한 게 있어서 상관없다는 듯. 상대가 믿어주지 않아도, 나아가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문제없었다. 가장 속이고 싶은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나는 사랑으로부터도 도망칠 구석만 있으면 당당해졌다.
반면 적절한 개구멍이 없으면 나는 불안해졌다. 도무지 머릿속에서 퇴로가 그려지지 않으면, 퇴로를 만들어줄 변명 거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골칫거리던 A 프로젝트를 망치면 B 프로젝트로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회사의 사정에 의해 B 프로젝트가 원천 차단 되었을 때. 나는 A로 돌진하는 대신 무식한 개구멍이 생기길 빈다. 회사에 가지 않을 수 있는 타당한 사유가 우연히 생기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아주 아주 우연하게 나를 위한 차원의 포탈이 생겨나길 바라게 된다. 그 소망은 때로 나는 차에 치여서 거동이 불편해지거나 수술로 치유가 가능한 암에 걸리는 것이 되기도 한다.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강해질수록 퇴로를 얻기 위해 감내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상상은 자극적으로 변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이 멈추고 개구멍으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상황은 크고 작게 발생했다. 작은 것들도 크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있었고, 나를 이토록 괴롭히는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날도 아주 가끔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런 극단적 도피의 마음과 상상은 보편적인 우울증의 증상이라더라. 어느 날 엄마가 드라마 <닥터 슬럼프>를 봤다면서 여주인공의 사연을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던 여주인공이 어느 날 도로에서 달려오는 차를 보고 치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서,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다고. 그리고 치료를 시작하면서 드라마의 전개가 시작된다면서.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선우정아 - 도망가자)
오랫동안 나의 도망에 대해 생각했다. 나아가기 위한 반동의 동력이라고 자위했지만 사실 그게 비겁한 생각이라고 마음 깊숙이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도망의 한글풀이는 ‘피하거나 쫓기어 달아남’이니까. 꼿꼿이 버티고 문제에 직면하는 ‘정도’가 아니니까. 자기혐오에 피식 웃게 되고 죄책감이 커지는 순간,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는 나를 지지해 주었던 목소리다. 도망쳐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을 넘어 같이 도망가자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니. 가장 유명한 첫 소절 뒤에 나오는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에서 나는 울어버린다.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힘겹게 울음을 참고 있었다는 걸. 점점 더 애달프게 도망가자고 외치는 노래는 마치 나를 설득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반대로 “아냐 나 도망 안 갈 거야”라고 말하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정서적 지지를 받은 나는 단단해지고 또 단단해진다. 그러다가 나는 번데기가 되어 문득 생각했다.
작고 짧게 도망치는 게 뭐가 대수냐. 나는 도망치는 생각만 했지, 결국 이토록 나를 괴롭히는 삶으로부터는 도망치지 않고 있는데. 삶에게서 진짜로 도망치지 않으려고 수많은 도망을 설계하고, 실행하느라 뛰어다니는데. 수많은 개구멍을 따라 점을 이어 그려보면 어쩌면 죽음을 등지고 저기 먼 곳까지 한 걸음씩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비호할 논리를 또 하나 만들어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이번에도 나는 기꺼이 나의 주장에 속아주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도망치는 습성도 사랑해 보기로 한다. 병만큼의 우울은 물론 치료해야겠지만, 도망을 생각하며 안정하고 싶어 하는 나와 때로 우울해지는 나도 사랑해 보기로.
P.S. 도망의 귀재, 개구멍 애호가, 진로 이탈자로서 용기를 얻은 나는, 용기를 준 노래 ‘도망가자’에도 패기 있게 소소한 반기를 들어본다. 돌아오자고 말하지는 말아 달라고. 초중반부 가사는 이 도주가 실은 다시 돌아오기 위한 거라며,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고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한 번 도망치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셈이기에 투정을 한 번 부려보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때에는 도망치며 오른 길에서 다시 도망치는 것이니,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 우리는 고통 속으로 다시 돌아올 게 아니라 계속 도망쳐가면서 어떻게든 하루를 더 버텨내고, 살아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돌아오지 말자고, 계속 도망치자고 말하고 싶다. 덕분에 용기를 얻은 팬의 말이라고 하면 웃으며 들어주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