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먼스 이어 (Damons year) - pink pill (w100)
우여곡절을 넘고 넘어 나는 정신과 약을 먹는 사람이 되었다. 길고 긴 검사를 했던 날,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이 나의 병을 진단했던 그날에 나는 약을 먹게 될 거라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안도했다. 병자가 맞다는 생각에. 그간의 내 아픔이 꾀병이 아니라는 것에. 나에게 찾아온 이 증세들이 정말 병 때문이라면, 나는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 속으로 사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면서 나는 짐짓 진단을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제가 혹시 자기 연민 때문에 검사지를 허풍으로 작성했을 가능성은 없나요?”
경계해야 했다. 괜스레 기대했다가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내가 정말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 더 확인받고 싶었다. 선생님은 대답 대신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려 도표 하나를 보여주었다. 지능과 집중력 검사 결과였다.
“검사의 규칙을 빠르게 독파해 낸 것, 그간 성취해 온 것들을 보면 지능이 높은 편으로 보입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주어진 테스트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점수를 받아요. 하지만 환자 분의 경우에는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많이 흐트러졌어요. 우울 장애의 큰 증세 중 하나입니다. 원래는 더 일상생활이 힘들었겠지만, 그나마 원래 능력치가 높은 편이라 티 안 나게 다른 사람들만큼 제 몫을 해내고 있는 겁니다.”
아, 한번 더 안심했다.
갑자기 머리 좋다는 칭찬을 들었으니 눈치 없이 기분이 좋아지려고까지 했다. 그렇지만 또 경계해야 했다.
“제가 오늘따라 테스트를 대충 했을 가능성은요? 집중 한 번 못했다고 진단이 나오는 건 이상해요.”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내가 문제를 틀리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으로 임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시험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뭐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때였다. 선생님은 화면의 또 다른 부분을 짚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 그래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활성화 정도를 보여줍니다. 지금은 각성상태이니 교감신경이 더 활성화되어 있어야 하는데, 환자 분은 뒤바뀌어 있어요. 그것도 아주 심각한 차이로. 몸이 깨어있지 못한 상태이니 무기력한 겁니다. 단편적인 결과가 아니고 여러 가지 검사 결과를 종합해서 나온 진단이예요. 우울증으로 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을 100이라고 둔다면, 5명 안에 꼽혀요. 심각한 상태예요. ”
손가락에 알 수 없는 기구를 끼우고 몸의 흐름을 체크했던 테스트였다. 이건 나의 주관이 들어가려야 들어갈 수 없는 테스트.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든 것은 환상통이 아니었어요.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서 만들어낸 가짜 복통 따위가 아니었다고요. 하지만 한 번만 더 여쭤볼게요.
“저, 근데 정말 그렇게까지는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그건 환자분의 상태가 만성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급격히 심해졌다지만 인식하지 못한 동안에도 병증이 있는 상태였을 거예요. 조금 나빠지면 힘들고 조금 좋아지면 괜찮고 하면서 보내셨겠죠. 다른 사람들은 훨씬 편안한 상태로 삽니다.”
맞아요 선생님. 저는 정말 힘들었거든요. 왜 나만 이렇게 힘들까 생각했거든요.
고장 난 수도꼭지가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 힘드셨겠어요,라는 위로나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 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한 공감을 받은 기분이었다. 끝도 없는 물속을 걷는 것같은 이 느낌은 허상이 아니고 진짜였다. 때때로 멍청해지는 것 같았던 느낌도 착각이 아니었다. 비로소 온 우주가 나의 고통을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는 계속 이렇게 버티면서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치료가 되는 고통이라는 사실만으로 희망을 봤다.
내가 처음으로 처방받은 약은 자나팜, 뉴프람, 알프람이라고 했다. 모든 신경계 약은 ‘잘 맞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약은 어지러움을 유발할 수도 있고 복통이 생길 수도, 체중 증감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게 뭐든 작용이 큰 것은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늘 생각해 왔기에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머리를 통째로 뒤바꿔놓으려는데 다른 장기가 영향을 안 받을 리 없다. 말 그대로 ‘부’ 작용, 부수적인 증세만 찾아오길 바라면서 그것을 줄여나가고 익숙하게 만들어가는 시간이 내게 필요할 터였다. 신경정신과 약의 복용기간은 최소 1년이라고 하더라. 그 이상 함께 하게 될지도 모르는 나의 반려 약들을 정하고, 또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네모난 분홍색 알약을 삼키면 슬픔은 잠시 마취되고' (데이먼스 이어 (Damons year) - pink pill(w100))
처음에는 약을 먹었을 때 달라진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을 그냥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증상을 팔로우하기 위해 적어둔 일기를 꺼내보면, 이렇게 적혀있다.
‘요즘의 저는 기력이 매우 없고, 변화가 무서우며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요. 다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행복하게 대할 기력이 없으니 사람을 만나기도 싫구요. 막상 만나면 잘해요. 달콤한 것을 계속 먹고 싶어요. 약을 먹기 전에도 그랬어요. 살면서 항상 식욕이 넘쳤는데 지금은 마구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면 못 먹겠어요. 대체로 기를 쓰고 찾아내려고 하지만 어려워요.’
그러니까 이 무기력함이 심각해진 병세인 건지 나를 차분하게 하는 약의 작용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비정상인지 나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저 물속에 갇혀서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을 바라보았다. 먹고, 일하고, 자고를 반복했다. 회사는 때마침 전체 재택근무에 돌입했고, 스스로도 역병이 도는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좁은 침대와 낮은 책상을 오가는 삶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잠을 너무 많이 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할 일이 없어서인 줄 알았고, 아파서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돌이켜보니 8시 반, 9시부터 잠을 자고 있었다. 일찍 잠드니 새벽 4시에 깨는 일도 많았다. 눈을 뜨고 있어도 잠든 것과 다름 없는 상태였으니 큰 차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하게 느껴져서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려야지, 하고 생각하고 또 잠에 들기도 했다.
데이먼스이어의 가사가 생각났다.
‘네모난 분홍색 알약을 삼키면 슬픔은 잠시 마취되고, 흐르던 눈물의 이유도 잊어버리고 나 조금은 멍청해진 것 같아.’ 이전까지의 나라면 이건 비유라고 생각했겠지만 뇌와 신경에 영향을 미치는 약을 먹어보니 나는 데이먼스이어도 어떤 특정한 약을 정말로 먹어본 것 같다고 짐작했다. 찾아보니 이 곡에 등장하는 pink pill은 ‘프리스틱서방정’이라는 항우울제였다. 알약은 정말로 네모나고 w100이라고 적혀있었다. 왜 그도 정말 이걸 먹어본 게 아닐까 생각했냐면 상상이라기에 그의 표현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텐데 싶을 정도로. 약을 먹는 동안 내 우울은 정말 ‘마취’되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상은 있는데 감각을 강제로 막아둔 상태. 내 ‘발밑의 재앙은 피할 수 없’고 ‘나의 두 귓속엔 아주 나쁜 말들이 맴돌’지만 약은 그것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떤 판단도 하지 못하게. 그냥 생각하지 말고 잠을 자렴-하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아픔인지 치료인지 모르는 것들이 혼란스럽게 물웅덩이에 나와 함께 고여있었다. [pink pill] 이 수록된 앨범 “sin !”에서 이어지는 데이먼스이어의 나긋하고 나른한, 때로 절망적이어서 다정했던 목소리와 함께 나는 오래도록 침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