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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동 언니 Oct 01. 2024

난 취했어 모든 질문은 잊기로 했어

짙은 - PUNCH DRUNK LOVE SONG

“만성이고, 심각해요.”


상담을 그만둔지도 한 달. 시간은 흘러서 또 한 번의 연말이 되었다. 연말연초가 으레 그렇듯 새로워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은근하게 숨을 조였다. 가끔 용기가 나는 날이면 더 가끔 병원 생각을 했다. 상담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으니 다음 단계는 병원이 되어야 한다고 무의식 중 나는 알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다니고 있던 병원을 추천해 줬던 것도 벌써 3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갈 곳은 정해져 있는데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기가 생긴, 혹은 압박에 버티지 못한 어느 날 무턱대고 예약을 잡았다. 무턱대고라고 하기엔 2주쯤 뒤로 잡았으니까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는 했다. 아쉽게도 전혀 준비나 예열이 되지 않았던 상태로 1월의 어느 날, 집에서 20분 거리의 병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지만...


무슨 약속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원 전날 나는 술을 진탕 마신 상태였던 것만 선명하다. 추운 겨울이었으므로 무릎을 넘는 롱패딩으로 나를 둘둘 말아서 집 밖을 나섰다. 상담 때는 그리도 설렜던 각종 검사였는데, 1시간이 넘는 검사를 한다는 말에 피곤하게 끄덕일 뿐 큰 기대가 생기지는 않았다. 아마 그때까지도 조금 취해있었던 게 아닐까. 어제 술을 많이 마셨고 멍한 상태라고 말씀드렸지만 검사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했다. 검사는 정말로 다양하게 진행되었고— 이 검사와 검사 결과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더 자세히 풀어보려고 한다— 점심시간을 가진 후 결과 상담을 들으러 갔을 때 원장 선생님이 여러 말씀을 해주시며 내린 결론은 딱 두 마디로 정리되었다. “만성이고, 심각해요.” 여러 도표가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들. 당연히 긴 진료와 많은 약 처방을 받았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나는 약 2-3주 간 더 병원을 안 갔다. 


약을 당장 먹기 시작하고 경과를 보러 일주일에 한 번은 오라고 하셨건만. 변화에 대한 두려움도 물론 내면엔 있었겠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술’이었다. 술, 지금도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술. 


신경정신과에서 처방하는 약은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술, 담배, 커피처럼 직간접적으로 신경에 영향을 미치는 기호식품과 함께할 경우 뇌를 망가뜨릴 수 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대부분 그렇고, 그중에서도 그 영향이 큰 약물들이 몇몇 있는데 나에게 처방된 약들 중에도 영향이 큰 축에 들어가는 게 꽤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술을 끊고 약물 복용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 약을 언제까지 내가 먹게 될지 미지수라는 거였다. 한약처럼 한 재를 다 먹으면 끝이 아니라 신경정신과 치료는 기본이 1년, 나처럼 증세가 좀 안 좋은 사람은 당연히 그 이상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다이어트를 앞둔 사람의 간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 술을 못 먹는다고? 그럼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지? 적어도 지금까지 잡아둔 약속이라도 전부 소화하고 나서 약을 먹기 시작해야겠어.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도 미리 만나자.’


정말이지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생각을 주변에서 알았다면 뭐가 중요한지 모르는구나, 정신이 나갔구나, 이상한 애네!라고 꿀밤을 쥐어박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니까. 약을 먹기 시작한 시기를 되감아 보다가 술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도 그 당시 내가 약을 미룰 정도로 술을 떼지 못했던 게 이상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중독자처럼 매일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말술로 퍼먹어야 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때의 나는 왜 술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사람을 만날 때 술을 안 마시는 게 왜 불편하게 느껴졌을까? 술을 못 마신다고 생각하니까 왜 걱정이 됐을까? 어쩌면 내가 스트레스와 우울을 이겨내려는 스스로의 치료제로 술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타고난 술꾼은 아니다. 주량도 잘 봐줘야 와인 한 병이 좀 안되고, 소주는 맛없어서 먹지도 못한다. 술을 왜 먹냐고 물어본다면 두 가지 정도로 답을 좁힐 수 있다. 맛과 분위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에 어울리는 술을 곁들이면 얼마나 맛있게요. 오죽하면 결혼을 뜻하는 ‘마리아주’라는 단어를 쓰겠냐며 나는 항상 음식과 술의 궁합을 찬양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아마 앞으로 죽을 때까지 신봉할 것이다. 그리고 술이 자리에 꼈을 때 생기는 특유의 유들유들한 분위기를 사랑한다. 만남과 대화의 기억에서 술은 항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화제를 블러 처리하고 장면을 빠르게 돌려주었다. 잊고 싶은 것들은 순간에 지워지고, 우리는 어색한 초반에서 부드럽게 풀어진 중반으로 점프한다. 텐션을 올려 공기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는 것은 또 어떻고. 당시의 나는 그 화학작용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 도움이 없이는 고민을 잊고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술 없이 사람을 만난다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 그 부분이 이상하고도 위화감을 주는 지점이었다. 


난 취했어 모든 질문은 잊기로 했어 - 짙은, ‘PUNCH DRUNK LOVE SONG’ 


난 취했어 모든 걱정은 잊기로 했어’로 시작한 다음에는 ‘세상이 정해놓은 질문에 답하지 않을 거야’라는 가사가 이어진다. 나의 증세 중 하나는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당시 내가 느끼기에 세상 모든 것은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고, 나는 그걸 아득바득 속으로 답해내느라고 잠도 잘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무거운 주제들에 대해 뇌내 질의응답이 활발해지는 상황이 오면, 멀티가 안 되는 나는 언어를 먼저 내려놓게 된다. 회의 시간에도 느리게 답하고 엉뚱한 말을 원치 않는 타이밍에 하고. 몇 분 전의 내가 또 마음에 안 들어서 뇌내 질문 목록에 ‘대체 왜 그랬어?’를 추가하고 만다. 그럼 또 현재의 나는 과부하에 걸려 버벅거리는 껍데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심각할 땐 회사에 미리 양해를 구하고 0.5배속으로 느릿느릿 회의를 진행해야 했을 정도였다. 


이 못 말리는 굴레 속에서도 나는 종종 사람을 갈구했다. 다시 짙은의 노래 ‘PUNCH DRUNK LOVE SONG’으로 돌아가서, 후렴 부분의 가사처럼 ‘날 좀 잡아줘 날 좀 안아줘’를 외치고 싶은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버그 걸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고. 그걸 술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걸 어느 순간 알았다. 술은 버그 모드에 대한 걱정으로 어두워지는 얼굴을 밝히고, 떨어진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는 한 편 머릿속에 가득 찬 질문 일부를 블러 처리해서 현재에 강제로 집중시켰다. 조금 취한 상태의 내가 평소의 나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럼 술을 계속 먹으면 되지 않냐고? 안타깝게도 음주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길어야 그날 밤이 다이고, 다음 날 아침은 오히려 더 다운되었다. 낙차가 크게 느껴진 탓일 테다. 안정되어야 하는 교감, 부교감 신경계에 인공적인 교란이 생겼으니 그럴 법도 했다.  


무엇보다 취한다고 수많은 질문들이 잊히진 않더라. 


아마도 그것은 내 머릿속을 떠도는 질문들이 사실, 세상이 내게 무작위로 던진 것이 아니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 질문을 들여다보기에, 당시의 나는 너무 어리석고 너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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