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동 언니 Sep 24. 2024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이상은 - 언젠가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나의 상담 실황은 어땠을까. 잠시 회고해 보기로 한다. 


상담실 가운데에는 작은 원형 탁자가 위치해 있었고, 5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인자한 선생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굽실굽실한 단발머리에 웃는 얼굴의 선생님은 테스트 기록을 보았다면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최대한 효율적이고 빠르게 나를 치료하고 싶었으므로 준비했던 나의 방문 계기와 소개를 줄줄 읊기 시작했다. 1회 상담의 가격은 비쌌고, 1회로는 효과를 알기 어렵다고 해서 5회분의 거금을 결제했던 터였다. 


“저는 상담 실장 김ㅇㅇ 와 친구 사이예요. 친구가 저를 많이 걱정해 주더라고요. 선생님께서 너무 좋으신 분이라서 꼭 한 번 만나보았으면 한다고 친구가 추천을 해줬어요.”


친구 이야기로 웃으면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려고 했다. 선생님도 실장 친구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테스트 결과지 속의 나와 잘 맞으니 앞으로도 귀한 인연이 되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가볍고 산뜻하게 상담을 시작한 것 같아서 좋았다. 그리고는 내가 고심했던 본론을 우다다다 시작했다. 


“저는 삶을 있는 힘껏 살아가는 편이에요, 그런데 요즘 들어 너무 힘들어요. 테스트 이후 상담 예약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도 할 게 많아서예요. 회사 일을 열심히 하고 야근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인데요, 자투리 시간에는 글도 써야 하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투자 공부도 해야 해요. 운동도 할 수 있는 한 계속 시도해보고 싶어요. 트렌드에 뒤처지는 것도 싫어요. 가끔은 친구들도 만나고 맛집도 가고 싶고요. 항상 시간이 아까워요. 힘들게 일한 날일 수록 더 아까워서 잠들지 못하고 자기 계발을 해요. 이미 퇴근 이후의 일정을 빽빽하게 잡아놓아서 상담 일정을 빼기가 어려웠어요. 촘촘하게 사는 게 보람차고 좋기는 해서, 제가 힘들다는 사실이 힘들어요. 어이없으시죠, 저도요. 다들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왜 저만 유달리 힘들어할까요? 어떻게 하면 빨리 좋아질 수 있을지 궁금해요.”


민망할 정도의 속사포 랩이었다. 선생님은 그저 미소를 띠고 ‘그렇군요’ ‘아하’ 등의 추임새만 곁들일 뿐이었다. 무언가 해답을 주기를 바랐는데. 생각이 많아지는 사이, 갑자기 준비하지 않았던 말이 앞니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다.


“행복하다고 느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문제는 그 한 마디와 함께 뭔가가 걸려있었던 건지 문장이 다 굴러 나오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테이블에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난감하고 창피했다. 

“아…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은 익숙하신 상황이시겠죠?”


선생님은 미소를 띠며 허브차 한잔을 더 따라주고, 휴지를 건넸다. 내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엉망이었을 거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미간이 찌부러졌는데도 입꼬리를 올려 웃으려고 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말하려는 듯. 아이러니하게도 입가에 신경을 몰두할수록 눈물은 더 쏟아졌다. 그때부터 상담이 끝날 때까지의 약 4-50분 정도는 웅웅 거리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주어진 시간이 종료되자 내 앞에는 눈물콧물 범벅의 휴지더미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이건 어디에 버리면 될까요? 더러워서 제가 버리고 싶어요”

선생님은 울고 난 휴지를 치우고 가겠다는 내담자는 처음이라며 착한 아이를 보듯 칭찬해 주셨다. 이게 다 울고 나서 내게 남은 상담 1회 차의 기억이다. 


돌아오는 길,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끝내고 나는 뭔가 아쉬워졌다. 원래 내 얘기만 줄이어 배설하고 오는 것이 상담인가? 주변과 인터넷 세상의 소견을 들어보니 1, 2회 차는 내담자의 상황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경험담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조급하기만 했다. 


2회 차 상담에서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다가 조금씩 나와 잘 맞는 인간의 유형들, 특히 배우자로서의 이상적 인간, 적당히 살고 적당히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디에도 해결책은 없었다. 여유 부릴 때가 아닌데. 난 빨리 나아야 하는데. 어서 나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다가 3회 차, 나의 조급을 선생님께 털어놓고 말았다. 


“저는 제가 어떤지 말씀드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해 주실 줄 알았어요. 저는 무엇을 해야 나을 수 있나요? 2주에 한 번씩 꼭꼭 오면 5회 상담이 끝날 무렵에 저는 괜찮을 수 있나요?”


놀랍게도 선생님은 내가 원하던 긍정의 확신을 주는 대신 ‘그렇지 않아도 2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오는 게 아니라 할 말이 있을 때 센터에 오기를 권고하고 싶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청천벽력이었다. 아니, 병원도 가다 말다 하면 낫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내가 생각보다 괜찮은 걸까? 그런데 왜 난 아직 힘들지? 이해할 수 없어 되물어도 선생님은 스스로 우러나와서 상담할 이야기를 가져오지 않으면 의미 있는 상담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그 후 나는 마치 다시는 상담센터에 발 들이지 말라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상담 센터를 찾지 못했다. 도무지 ‘상담할 거리’가 무엇인지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은 어디서부터 꼬였는지 알 수 없는 실타래였다. 문제가 시작된 실마리를 가져오라는 숙제를 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상담’이라는 단어는 내게 목에 걸린 가시처럼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것이 되었다. 당시에는 상담 선생님을 원망하고 센터를 잘못 찾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상담이라는 것 자체가 나와 맞지 않았던 건 아닌지도 여러 번 생각하며 그 사이 흘러간 시간과 악화되는 상태에 괴로워했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이상은 - 언젠가는)


그 후로 2년이 넘게 흐른 지금에야 나는 생각한다. 내가 그때 참 많이 아팠는데, 그게 아픈 것임을 몰라서 어렵게 돌아왔다고.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아플 때는 나의 아픔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시기, 나는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불렀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이미 알고 있던 노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그 노래를 부를 땐 눈물이 다 났다.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불확실함 속에서 세상으로 내던져진 우리가 두렵기만 했다. 그래서 그때는 가사의 첫마디가 들리지 않았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꼭 그 말처럼 나는 어린 나의 어림을 모르고 어리석게 그 파트를 흘려보냈었다. 그저 언젠가는으로 시작되는 미래에 기대어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이십 대 중반이 넘어서야 나는 다락방 구석에서 보물을 발견하듯 첫 구절을 찾아내어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여전히 나는 나의 젊음을 안다는 듯이 행동하고, 사랑도 지금 다 보이는데 무슨 말이냐며 코웃음 치는 애송이 반항아지만 그 말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특히 꼬여버린 마음을 어찌할 바 몰라, 상담 센터를 종종 거리던 나를 뒤돌아보면. 너무 아파서 아픈 줄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과거의 나를 글로 옮기고 나니 그것은 더 선명해진다. 강박적으로 조급했던 내가,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상담을 진행하면서도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던 내가. 아마 상담 선생님도 나에게 시간을 더 주어 그런 깨달음을 주고 싶었던 것일 테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였던 나에게 닿지 못했을 뿐.


지금은 스탠드 아래에서 그때를 회상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분명히 같은 과오를 반복했을 것이다. 입안이 쓰다. 하지만 뒤에 두고 온 나 자신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겼다는 것은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는 증명은 아닐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그리고 그때는 ‘헤어진 모습 그대로’ 알아보고 서로를 안아줄 수 있기를.

                     

이전 03화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는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