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적 표류

[깜언 베트남 34] 나이 마흔, 남자 셋, 여행

by 안효원

비는 오고, 눈은 붓고, 어디 갈지 모르겠고, 젠장, 이럴 땐 꼭 배가 고프지.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저쪽 골목에 할머니와 과일 자전거가 보였다. “귤 두 개 주세요.” 자연스레 한국어를 구사하는 안기자, 당연히 알아듣지 못하는 할머니. 지갑을 열어 “이거요? 이거요?” 다양한 호찌민을 만난 후 극적으로 계산 완료. 귤을 까는데, 과즙이 부은 눈에까지 튀었다. 꿀맛!


길은 그렇게 정해지고, 복잡한 시장에 들어섰다. 카페라 하기엔 좀 뭣한 곳들을 지나는데, 마시고 가란다. ‘잡는 사람은 일단 피하자’ 정신으로 가다가, ‘어차피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싶어 그냥 아무 데나 들어갔다. 코코넛에 빨대 꽂아 쪽쪽 빨면서, 이곳의 묘한 매력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말없이 벽에 기대앉아 아무것도 아닌 걸 보고 있다. 절대적 멍 때림의 세계다.


덩달아 멍 때리다 문득 음악이 듣고 싶어 졌다. 사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여자가 있다. 오수경, ‘살롱 드 오수경’의 리더이자 피아니스트. 그녀의 음악은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를 다른 세상으로 안내했다. 첼로는 일상의 행복을, 피아노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이올린은 격정적 감정의 소요를 일으켰다. 감은 눈을 씰룩이며, 음악에 푹 빠졌다가, 한 곡에서 눈을 떴다.


‘유목적 표류’, 총 9개 트랙 중 한가운데 5번 트랙. 여유롭게 시작해 절정의 순간을 맞는 것이, 나의 이번 여행과 꼭 닮았다. 방향 없이 표류하는 것 같으나, 나를 깊이 들여다(돌아) 보고 싶은 뚜렷한 목적이 있다. 당장 휴대폰 벨소리로 바꾸고 보니, 헉, 앨범 이름이 바로, <데미안>. 김사장이 어디 있나 주위를 둘러봤다. 이 소름 끼치는 상황에서, 그녀의 데미안이 궁금했다.


‘오랫동안 파리에 머무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나 자신을 탐구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고, 긴 시간 고민해왔던 “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왜 이따위로 생겨 먹은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각 외로 답은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름 아닌 ‘인정’이었습니다. 과거의 나를 인정했더니 현재의 나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해하고 나니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여 한 인간의 태어남, 성장함, 마주함을 솔직하게 그려낸 이번 앨범은 서사적이며 자전적인 성격이….’(<데미안>, 살롱 드 오수경)


자신을 사랑한, 자신의 길 가는 사람의 음악은 이토록 아름답다.


내 인생 2부를 ‘유목적 표류’라 명명한 역사적 순간에 찍은 사진이다.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대놓고 웃으면서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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