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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락, 그리고 엄마의 마음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by 도인

"저기 길 건너에 저거 도시락 같은데? 가서 한 번 봐볼래?"

아침 일찍부터 헬스를 다녀와서는 룸키를 가진 H를 호텔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여태 보이지 않던 작은 도시락 가게에 멈췄다. 딱 보기에도 너무나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 도시락들이다. 어제저녁에 구글 지도를 보며 오늘 어디 가서 브런치 먹을지를 미리 정해뒀다는 걸 깜빡하고는 묻는다.

"여기서 먹고 갈래?"


치킨 데리야키 덮밥과 햄, 삼겹살 구이, 계란이 얹어지고 파파야 샐러드가 곁들여진 덮밥을 샀다. 숙소 에어컨 아래서 시원하게 먹으면 좋겠지만 이번 숙소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H 생각에 먹고 가기로 했다. 먹고 가려고 보니 키가 큰 H에 앉기에 다소 작은 의자와 낮은 테이블이 눈에 보인다.

'이러나저러나 H에게 불편하네... 그냥 숙소에서 먹을까 그랬나..'

H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몸을 의자에 욱여넣는다. 테이블 다리가 H 다리 길이보다 짧은 것 같다.


도시락을 먹으며 물었다.

"학창 시절에 뭐 먹었어? 학교에서? 영국도 도시락 싸 다녀?"

"아니, 도시락을 싸서 다니진 않았고 school dinner라고 부르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먹었어."

"점심인데 왜 dinner야? lunch 가 아니고?"

"그러게, school lunch라고는 하지 않아. 대부분 따뜻한 음식들이 제공돼. 아마 산업혁명 시대에 옛 영국 노동자들이 가장 큰 식사를 낮에 해서 점심이 dinner로 불린 것 같아. 대신 저녁은 가벼운 식사로 tea나 supper라고 해."

"저녁에 tea라고? 신기하네.."

"그렇지? 학교에서 점심에 주로 따뜻한 식사가 제공됐는데 집에서 먹는 dinner 같은 것들이야. 그래서 그 단어를 여전히 쓰는 거 같아."

"메뉴가 어떻게 돼? 스쿨 디너는?"

"음.. 월요일엔 주로 Roast dinner라고 구운 고기, 감자, 야채랑 그래이비 소스가 얹어 나와. 금요일엔 피시엔 칩스. 그 외에 생각나는 건 코티지 파이나 소시지랑 감자, 커리 같은 것들이야. 넌 학교에서 뭐 먹었어?"

"난 도시락을 주로 싸서 다녔어. 생각해 보니 도시락을 열 때마다 나 조금 뿌듯했던 것 같아. 우리 엄마는 먹는 것에 진심이거든! 좋은 식재료를 사다가 맛있게 요리해서 가족들이 푸짐하게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하셨어. 도시락도 마찬가지야. 매일의 도시락에 열정을 듬뿍 담았던 것 같아."

"오, 좋았겠다. 도시락 메뉴는 뭐였어?"

"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어. 나 어려서 계란말이를 좋아했거든. 주로 김이랑 맛살이 들어간 계란말이였는데 매일 속의 재료를 조금씩 바꿔서 만들어 주셨어. 명란을 섞거나 야채를 넣거나 하는 식으로."

"와... 진짜 부럽다. 우리 엄마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으셨거든."

"그러니까 말이야. 뒤에 친구들이랑 이야기 나누면서야 모든 아이들이 이런 도시락을 먹지 않았다는 걸 알았지. 아니 그때도 알았는데 그게 그렇게 감사한 일인지 몰랐어. 친한 친구는 엄마가 매일 도시락에 기름에 볶은 양파랑 김치만 싸줬다고 했거든."

"그게 네 어머님 방식의 사랑이었던 게 아닐까?"

"그러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거 같아. 보통 도시락을 아침에 싸서 학교에 들고 가 점심에 먹는 건데 엄마는 막 만든 밥이랑 국, 반찬을 보온통에 담아서 학교 점심시간에 맞춰서 교실 뒷문으로 배달해 주시곤 했어.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그렇지? 그럼 저녁엔 뭐 먹었어? 집에서? 엄마가 요리를 안 좋아하셨다며?"

"응, 엄마가 요리를 하신다고 주방에 오래 계시긴 하는데 뭔가를 효율적으로 하지는 못하신 거 같아. 오이 다듬는 데 30분씩 걸리곤 했거든. 주로 저녁엔 가족끼리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각자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어. 왜 테이블 위에 빵, 콜드컷 햄, 슬라이스 치즈, 버터 같은 거가 놓여 있고 각자 알아서 이것저것 넣어서 자기 샌드위치 만들어 먹는 거 있잖아."

"아, 진짜 런치가 디너가 맞네, 디너가 티타임 같은 거고. 신기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둘 다 눈앞의 도시락을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

"이 집 음식 괜찮다. 깨끗하고 맛있어. 또 올래?"


음식에 큰 관심은 없지만 앞에 주어지면 곧잘 먹는 H. 처음에 만날 땐 잘 안 먹는 사람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음식이 주된 주제가 아닌 삶을 살았기에 그냥 주어지는 음식을 먹고살아서 그렇지 음식을 아주 좋아하고 잘 먹는 사람이 H이다.


그에 비해 나는 음식에 열정을 쏟는 엄마 덕분에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한 많은 요리들을 대부분 접해봤다. 이제는 내가 그런 음식을 직접 만들어서 누군가에게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다. 한국인이 배달의 민족이라지만 난 언제나 외식보다는 지역에서 나는 제철의 좋은 식재료를 사다가 잘 다듬어 요리해서 먹는 것이 기분이 더 좋다. 그냥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랄까. 아마 여행을 다니다 주방이 있는 집에 함께 머물게 된다면 H를 위한 요리를 매일 하게 되겠지. 혼자만을 위한 요리는 영 재미가 없으니까. 엄마가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H가 좋아하는 것들을 몽땅 만들어서 살을 찌워야겠다고 생각한다.


생각난 김에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맛있고 예쁜 음식 많이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하염없이 받은 사랑을 저도 누군가에게 돌려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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