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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라고!!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by 도인


H는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내가 자전거 사고가 나려고 할 뻔하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자전거를 타면 항상 기분이 좋아. 걷거나 달리거나 수영할 때랑은 다른 자유로운 느낌이 있어"
H는 한가한 시골의 쌀 밭 주변을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달리는 걸 좋아한다. 씨엠립에 오게 된 것도 한 영국인 여행객이 이곳의 농촌 풍경을 한가로이 사이클링 하는 모습을 담은 유튜브 클립을 우연히 보고 나서는 H가 제안한 것.


"넌 돌아다니는 거 싫어하잖아? 나도 지난 두 달 혼자 돌아다녀서 피곤하거든. 그냥 한달살기 하자던 네 말처럼 씨엠립에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아침 일찍 사원 주변이나 쌀 밭 주변 사이클링이나 하는 거 어때? 더운 오후에는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이나 하고 말이야."
자전거 타는 것도 수영도 좋아하니 꽤나 재미있는 제안 같아서 흔쾌히 수락하고는 여길 오게 된 것이다.

오늘 자전거를 타러 가자고 제안한 건 나였다. H는 새로 옮긴 숙소를 맘에 들지 않아 했다. 씨엠립에 온후 지금까지 2주 동안 꽤나 좋은 숙소에 머물게 됐다. 집이 좋아서 그랬는지 H는 여태 어디 나갈 생각을 않고는 나무늘보처럼 침대, 소파, 수영장만 왔다 갔다 했다. 그러더니 어제는 갑자기 이제 자전거를 타고 사원 주변을 달릴 준비가 됐단다. 대뜸 오늘 나는 뭐 할 거냐고 묻길래 그냥 평소대로 헬스장 갔다가 수영장에서 좀 식히고 카페에서 책 읽고 글 쓰고 저녁 먹으려는데? 아무 말이 없는 H. 숙소가 마음에 안 들어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단 걸 뒤늦게 알아채고는 내일은 앙코르와트 사원 주변에 자전거를 타러 가자고 말하니 활짝 웃으며 "Yes, Yes." 그런다.

신이 난 H는 구글 지도를 켜고는 어딜 돌아볼지 지도를 확대해서 여기저기 살펴본다.
"우린 입장 티켓이 없으니까 여기 티켓 검사하는 포인트까지 갔다가 그 옆으로 물 따라 한 바퀴 도는 거야, 어때?"
"응, 아무렇게나 해도 돼. 난 상관없어."
나는 배달의 민족답게 가는 방향에 있는 맛집을 검색해 본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식당을 우선으로 검색해서 몇 개를 구글 지도에 저당해 둔다. 가는 길목의 카페도 몇 개 저장해 둔다.

씨엠립 시내를 벗어나 앙코르와트 사원 방면으로 자전거를 한참 달렸다. 한가한 쌀 밭 주변을 달리고, 물소 떼가 한가롭게 물을 마시고 목욕하는 호수 주변을 달렸다. 현지인들이 사는 마을 주변 곳곳을 달리며 모두와 웃으며 인사를 했다. 이곳 사람들의 웃음은 때가 묻지 않았다. 순수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게 얼굴에 쓰여있다. '아직도 이런 좋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네.' 생각하며 반갑게 여기저기 Hello 인사한다. 제주에 귤나무가 지천에 있다면 여긴 망고나무가 집집마다 골목길에도 그만큼 있다. H는 자전거를 타는 내내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4월은 캄보디아의 가장 더운 달 중 하나이다. 한낮엔 36도, 체감 온도는 40도에 육박한다. 자전거를 달리면 바람이 불어오니까 그나마 낫지만 그럼에도 매우 더웠다. 사이클링을 멈추고는 쌀 밭 주변의 카페에 잠시 앉아 한숨 돌린다.
"이 여행에 함께해 줘서 너무 고마워. 나 너무 행복해."
여기 오고 나서 매일 행복해하던 H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인다.

카페 옆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캄보디아식 비빔국수 가게에서 아주 늦은 점심을 먹고는 앙코르와트 사원 방향으로 자전거를 달렸다.
"와 저기 사원이 보여!!"
조금 페달을 돌리다 보니 정말이다. 저기 사원이 보였다. 19년 만에 다시 보는 앙코르와트 사원이라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구나...'라며 잠시 우수에 젖을 즈음 티켓 체크포인트에 다다랐다. 티켓이 없어 돌아 서며 다음을 기약했다. 검사원이 5시 30분 이후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며 팁을 알려준다.

사원 주변을 느리게 달리다 또 다른 카페에서 패션프루츠 음료를 마시고 삶은 땅콩 한 봉지로 간단히 요기를 하며 쉬었다. 그러고 나니 벌써 해 질 녘.
"5시 30분에 무료입장 이랬잖아? 집에 바로 가지 말고 둘러보고 갈래?"
나는 무더위와 30킬로미터가 넘는 사이클링에 조금 피곤해져서 집에 어서 가고 싶었지만 H는 아닌 듯했다. 그래, 이런 기회가 또 어딨을까 싶어서 다시 사원을 찾았다. 서쪽으로 해가 뉘엿뉘엿 져간다. 사원의 서편 출입구를 통해 천천히 사원을 향해 걸어가며 석양에 비춰 바뀌는 사원과 주변 풍경의 색을 가만히 지켜본다. 몽글몽글한 무언가를 촉촉이 머금은 것 같은 색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돌 길을 지나다녔을까?
"정말 완벽한 타이밍이야! 티켓이 없어서 앙코르 사원을 오늘 직접 가까이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감성이 풍부한 H는 이 순간에도 많은 의미를 찾고 있는 듯했다. 석양이 드리운 조각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여기 같이 와서 참 기뻐."
사실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가 여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누군가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니.. 내가 그런 사람이라니 나도 놀라워..'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H를 본다. 어찌 됐건 H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퇴근 시간과 맞물려 차와 오토바이, 트라이시클로 북적였다. 조심성이 많고 타인을 배려하는 게 몸에 밴 H는 좀처럼 그 사이를 뚫고 길을 건너거나 앞서 나가지 못한다.
'저러다가는 집에 영영 못 가겠네.'
그와는 반대의 성격인 나는 답답함에 내가 먼저 자전거 앞바퀴를 내밀며 무작정 앞서 달려 나갔다. 내가 먼저 가면 남들이 알아서 멈출 거라는 생각으로. '설마 차로 치기야 하겠냐?'

"Wait!!!!!"
H가 소리 질렀다. 그 큰 목소리에 놀라 길을 건너려다 말고는 급하게 자전거를 멈춘다. 좀처럼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H의 목소리였다. 그때 내 눈에 보이지 않던 큰 도요타 SUV가 내가 타고 있던 자전거 바로 앞에서 멈췄다.

"아, 알려줘서 고마워."
멈추지 않았다면 큰 사고가 났을 뻔했다.
그 뒤로 집에 올 때까지 H는 말이 없다. 집에 와서도 내내 시무룩하다. 다른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H에게 묻는다.
"Tell me."
"난 안전이 정말 중요해. 그래서 조금 늦은 결정을 내리고 행동이 늦어지기도 해. 그런데 오늘 네가 날 좀 답답해하고 인내심이 없어 보여 슬펐어. 사고가 날 뻔했잖아."
사고가 날 뻔한 순간이 떠올랐는지 이내 H가 눈물을 흘린다. 너무나 미안했다.
"미안, 내가 성급하게 행동했구나. 난 그저 조금 피곤해져서는 빠른 의사결정을 하고 빨리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그랬어. 맞아 사고가 날뻔했어. 다음부터는 나랑 너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할게. 미안해. 앞으론 네가 항상 먼저 앞서 가. 난 뒤따라 갈 거야. 나 먼저 앞서가면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잊어버려. 앞서서 빠르게 나가는 것에 도취돼서 말이야. 정말 미안해"
"사과해 줘서 고마워. 난 우리가 안전했으면 좋겠어. 조금 느리더라도 말이야. 이제 괜찮아. 저녁 먹으러 가자"

언제나 남보다 한 발짝 앞서하고 같이 보다는 혼자 빠르게 해치우는 걸 좋아하는 성급한 내 모습이 또 나오고야 말았다. 이렇게 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해도 되지 않는 나의 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조차도 나이기에 사랑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놓친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는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으리라고 누군가를 마음 아프게 하지는 않으리라 다짐을 해도 잘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렇지 않을 수 있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언제쯤 답을 찾게 될까? 어떻게 해야 내 속도를 진정한 아다지오 템포로 바꿀 수 있을까? 소중한 것을 더 놓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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