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오… 벌써 나가? 어디 가는 거야?”
“근처 시장에 걸으러 가. 월요일 아침 로컬들의 분위기는 어떤지 궁금해. 뭐 먹을 거나 마실 거 사 올까?”
“아침에 보태니컬 가든 걷고 커피 마시자고 하려 했는데…”
“금방 올게. 수영하고 씻고 있어 그럼.”
모처럼 H가 아침부터 뭔가를 하자고 한다.
씨엠립에 온 지 어느덧 15일째. 처음 계획은 이랬다.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앙코르와트를 페달링 하고, 쌀밭 사이를 목적 없이 떠도는 일. 그게 H가 생각하는 여유라고 했다. 뜨거운 태양이 시작되기 전, 하루를 차분히 여는 방식.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우리는 아직 자전거 한 번 타지 못했고, 앙코르와트는 그림 속 풍경처럼 머물러 있었다. H는 이곳에 오기 전 두 달 동안 필리핀을 혼자 여행했다. 그때의 H는, 지금처럼 침대와 소파, 발코니, 수영장을 천천히 오가는 나무늘보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걸었고, 움직였고, 장소를 옮겼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익숙했던 H였지만, 어느 순간 지쳤다며 고백했다.
“그냥 한 달쯤은 어디 안 가고 머무르고 싶어.”
그래서 내가 제안했다. “그럼 그냥 어디 가서 한 달 살기 해볼래?"
그렇게 하루에 9시간에서 12시간까지 곤히 자는 H의 나날이 이어졌다. H가 하루에 하는 일이라곤, 밥 먹기 전까지는 침대에서 소파로, 발코니로, 그리고 다시 수영장으로 이동하는 것뿐이다. 책을 읽고,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일의 전부. 나갈 때도, 꼭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움직인다.
나는 H보다는 조금 더 활기차다. 우리는 여행의 밀도를 높이고 싶은 마음에 5일마다 다른 동네의 숙소로 옮겨 머물렀다. 아침 일찍 새로운 동네의 로컬 마켓이나 골목길을 걸으며 그날의 분위기를 살핀다. 동네 헬스장을 찾아다닌 것도 내 일과 중 하나. 1달러 헬스장에서 매번 다른 기구를 쓰는 건 예상보다 흥미롭다.
“나무늘보라고 하더니, 정말 나무늘보가 맞네.”
그 말에 H는 웃는다.
오늘은 월요일 아침.
보태니컬 가든을 천천히 걷다가, 그 안의 카페에 앉아 H가 웃으며 말한다.
“오늘 월요일 아침이야.”
그 말이 왜 이렇게 와닿았는지.
H도 영국에서 일하던 시절, 일요일 저녁부터 월요병이 시작됐다고 한다.
“월요병을 일요일부터 앓았구나, 너?”
그 말을 들으니 나 역시 떠오른다.
나도 한때는 일하는 것을 꽤나 좋아하는 워커홀릭이었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기 직전 몇 해는 유독 월요일이 싫었다. 아침이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야만 하는 상황이 힘들어졌고,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더는 못 참겠다. 아침엔 산책이나 하고 브람스나 듣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면 안 될까?”
그 순간부터 나는 ‘삶의 속도’를 다시 조율하기 시작했다. 내 앞의 모든 게 내가 직접 한 선택의 결과였지만, 정작 내가 정말 원한 선택이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왜 남들이 원하는 걸 내가 원한다고 생각했을' 곱씹어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 게 아닌데... 대체 왜 내가 이러고 있는 거지?'
이런 물음 끝에, 나는 H와 함께 월요일 아침 보태니컬 가든의 카페에 앉게 됐다.
햇살은 뜨겁지만, 그늘 아래 바람은 시원하고, 초록은 깊다.
노랗고 빨갛고 하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고, 새들은 여기저기서 지저귄다.
이 모든 풍경이 내게 말해준다.
지금 이 선택이 옳았다고.
정말 옳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