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오늘 점심엔 룸 피크닉 할래? 날씨 덥잖아. 그냥 이것저것 사 와서 숙소에서 먹자."
"그럼, 저번에 먹었던 돼지고이 꼬치랑 바나나 찰밥 어때? 냉장고에 망고도 있고"
"좋아."
"Foraging(먹이를 구하다)하러 나갔다 올게."
"매번 잘 먹여줘서 고마워."
세 번째로 옮긴 숙소는 시내에서 다소 벗어나 앙코르와트 사원 근처에 위치해 있다. 시내에서 벗어난 숙소를 구하고 보니 주변에 걸어서 갈만한 쾌적한 카페와 식당이 거의 없다. 동남아시아는 3월-4월이 가장 더운 달이다. 날씨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15분 이상 걸으면 식욕이 싹 달아날 것 같다. 결국 이번에 구한 숙소에서는 줄곧 음식을 사다가 에어컨을 시원하게 켜고 숙소에서 먹곤 했다. 음식을 사 와서 숙소에서 먹는 걸 H는 룸 피크닉을 즐긴다고 말한다.
H는 음식에 큰 관심이 없다. 그에 비해 나는 한국인이 아닌가? 한국인은 뭐다? 금강산도 식후경을 하는 민족이 아닌가? 특히 나는 음식을 좋아한다. 음식을 먹는 것, 음식을 만드는 것, 음식 만드는 것을 보는 것, 다양한 식재료를 구경하고 만져보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을 오면 그 지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제철의 다양한 야채와 과일들을 보고 만져보는 게 즐겁다. 그냥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그들이 먹는 길거리 음식들을 구경하는 것 또한 큰 즐거움 중 하나다. 그러기에 여행을 오면 꼭 현지인들이 가는 시장을 들른다. 현지인들의 생활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다양한 식재료와 음식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먹이 사냥은 자연히 내 몫이다. 물론 나에겐 이게 일이라기보다는 즐거운 활동에 가깝다. 숙소를 예약하고 교통 정보를 알아보는 등 여행 계획 하기를 좋아하는 H가 대부분의 바깥일들을 처리한다. 나는 먹이 사냥을 나서서 H가 하루에 적절히 영양을 섭취하도록 먹이 사냥을 하면 된다.
H는 대부분 잘 먹는다. 특히 참깨, 코코넛과 관련된 건 뭐든 좋아한다. 일단 음식에 참깨가 붙어 있으면 산다. 코코넛 플레이크가 뿌려졌거나 코코넛 밀크를 이용해 요리된 것들도 산다. 소스가 많은 건 싫어하니까 뭔가 흘러내리는 액체가 많은 것보다는 단일한 음식 채로 잘 여며지고 정돈된 것들 위주로 고른다. 탄수화물이든 단백질이든 영양성분을 딱히 고려하지는 않는 것 같고 단것보다는 소금기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음식 남기는 걸 좋아하지 않아 다 먹고 조금씩 남아 있는 음식들은 모두 H가 먹어치운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먹고 또 먹는다. 자신을 가족들이 dust bin 쓰레기통이라고 부른다고.... 영국 집에서도 남은 음식 처리를 전담하고 있단다.
나는 음식의 맛보다 기능에 더 초점을 둔다. 보디빌딩을 계속 이어가고 싶기에 일단 충분히 단백질 많이 먹기를 최우선 과제로 둔다. 그래서 식사할 때 먼저 헬스장에서 파는 삶은 달걀 3개를 먼저 먹고 시작한다. 캄보디아 헬스장에서는 삶은 달걀과 바나나를 판다. 달걀 1개에 1000리엘씩 350원꼴. 매일 헬스를 마치고 올 때 3개씩 사 와서 식사 때 먹는다. 단백질 파우더보다 건강한 느낌이다. 그러곤 배고픈 걸 싫어하니 신선한 야채로 최대한 배를 채우고 제철 과일로 비타민을 채운다. 살이 잘 찌기에 탄수화물은 제한하려 노력한다. 물론 새로운 디저트 앞에서는 바로 결심이 무너지기에 탄수화물 제한 식단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 오늘 점심은 이걸로 정했다. 삶은 달걀, 돼지고기 꼬치구이, 찹쌀밥을 감싼 바나나 구이, 망고, 코코넛 빵, 타로 빵, 참깨가 가득 뿌려진 캄보디아 디저트, 계란찜이 채워진 단호박찜, 땅콩 조금 등등
돼지고기 꼬치구이는 시장 가는 길목의 모퉁이에서 아저씨가 매일 굽고 있다. 데리야키 소스에 재운 얇은 돼지고기를 꼬치에 구워서 판다. 역시 1 꼬치에 1000리엘. 다들 예상할 수 있는 맛이다. 아무렴 그냥 맛있다. 사실 혼자 10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주 가서 사 먹었더니 지나가면 이제 아저씨와 눈인사를 하는 사이가 됐다.
바나나 구이 아주머니는 돼지고기 꼬치구이 대각선 방향에 서 계신다. '땡큐'라고 망하면 캄보디아어로 '아콘'이라고 여러 번 말하며 캄보디아어를 알려주려고 한다. 나도 '아콘, 아콘'으로 대답한다. '맛있는 거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으로 말한다. 바나나를 꼬치에 5개 꽂아 구운 건 2000리엘, 찹쌀밥에 싸서 구운 바나나 1개는 1000리이다. H와 나는 찹쌀밥이 둘러싸여 구워진 바나나를 더 좋아한다. 코코넛밀크를 넣어 만든 찹쌀밥은 코코넛의 고소함이 가득하다. 한 잎 베어 물면 바나나의 달콤함과 코코넛 향이 어우러져 디저트로 제격이다.
망고는 1킬로에 4000리엘(1450원). 제법 큼지막한 망고가 3개를 5000리엘을 주고 샀다. 시장 안쪽에 가면 1킬로에 2500리엘이지만 귀찮아서 시장 끄트머리 가게에서 그냥 사기로 한다. 먹기 딱 좋게 잘 익은 노란 망고다. 한국에서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선한 망고다. 가끔 한국에서 망고를 사 먹으면 후숙 과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 쭈글거리거나 상하곤 했었는데 여기선 그저 완벽하게 샛노랏게 익은 망고를 맘껏 먹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시장으로 들어서서 고기, 생선, 야채가 즐비한 길을 걷는다. 식재료를 사러 온 현지인들로 시장이 복작 인다. 껍질이 벗겨진 개구리나, 도축된 개, 로컬 야채와 과일들을 마음껏 구경한다. 잘 찾아보면 중간중간 할머니들의 조그마한 좌상을 발견할 수 있다. 집에서 가정집 레시피로 만든 캄보디아 디저트를 판다. 그냥 지나 칠 수 없다. H가 좋아할 것 같은 코코넛이 들거나 참깨가 뿌려진 것들로 먹어보지 못했던 신기한 디저트를 한두 개 산다.
오늘 먹이 사냥은 이걸로 끝.
H가 잘 먹는다.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그런데 너 탄수화물보다는 단백질을 더 먹어야 될 거 같아. 뭐 어렵진 않아. 내가 알아서 차려주는 거 너 먹으면 돼."
"그래? 다음에 발룻을 메뉴에 넣어 줘. 메뚜기나 밀웜 튀김도 좋고.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먹어보겠어? 좋은 단백질원 같은데. 너도 먹고?"
H가 매번 농담하듯 제안한다.
'흠... 아무리 단백질이라지만 그 먹이사냥은 못할 것 같아...'
*발룻: 부화 직전의 계란을 삶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