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르덴 형제 <소년 아메드>
옆집 문 앞 바닥에 몇 주째 종이조각이 떨어져 있다. 부재중 우편 등기를 배달하러 왔었다는 알림 스티커다. 처음에는 남의 집 알림 종이를 버리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뒀는데, 이제는 굳이 내가 줍기 싫어 그냥 둔다. 택배는 잘도 가지고 들어가면서 떨어진 스티커는 몇 주째 그대로다. 별 것도 아닌데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 작은 일에도 신경이 거슬리는데... 타인과 살아간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과 살아가기
장 피에르 & 뤽 다르덴. 다르덴 형제라 불리며 언제나 공동작업을 하는 두 감독은 영화 속에 '이질적인'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이 사회에서 쉽사리 융화될 수 없는 돌출된 타자. 두 감독은 현실의 어려움 또는 딜레마를 지닌 인물에 밀착하여 그/그녀와 타인 또는 사회와의 관계를 현미경을 들이대고 바라본다. 사회적, 관계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곧 동시대 최전선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인 셈이다.
부모에게 버림받는 아이(<자전거 탄 소년>),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이(<아들>)에 대한 연민과 수용의 문제에서부터, 유럽의 이민자 사회 속 관계를 다루는 <로나의 침묵>과 <언노운 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노동과 연대의 문제(<내일을 위한 시간>)와 <소년 아메드>에서의 종교 문제까지.
다르덴 형제는 언제나 가장 논쟁적일만한 주제를 고른 뒤, 당사자들의 뒤를 바짝 쫓아간다. 그들의 걸음걸이를, 말과 몸짓을, 감정을 가능한 자세히 들여다본다.
핵심은 영화 속 인물들이 '평범한 이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의 도덕적, 윤리적 선택을 추동하는 이웃, 나를 커다란 딜레마에 놓이게 하는 달갑지 않은 이웃. 하지만 함께 살아가야 하는 주변의 수많은 타인들. 우리는 다르덴의 카메라를 통해 때로는 나 자신일 수도, 때로는 타인일 수도 있을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소년 아메드>는 극단적 이슬람주의에 빠진 소년 '아메드'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종교 극단주의에 잠식당해가는 어린 소년 아메드를 핸드헬드 카메라로 주시하고 쫓아간다.
여성과는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며 어릴 때부터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님 이네스(Myriem Akheddiou)와 악수도 하지 않고, 히잡을 쓰지 않고 술을 마신다는 이유로 엄마를 '배교자'로 취급해 멀리한다. 자살테러를 감행한 사촌은 숭배의 대상이 되며, 기도 시간을 지키는 것과 기도 전 몸을 청결히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극단적 이슬람 지도자에게 세뇌당한 아메드는 종교적 신념 하에 스스로 몸과 마음을 통제하고, 급기야는 유대교 남자친구를 사귀고 잘못된 아랍어 수업을 한다는 이유로 이네스를 해치려고까지 한다. 아메드에게 부재한 아버지의 자리는 이슬람 지도자 이맘(Othmane Moumen)이 대체한다.
감독은 최근 프랑스와 벨기에 등에서 어린 청년이 감행하는 자살테러를 보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메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 같은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히게 됐는지는 이맘과의 대화 등을 통해 간단히만 표현되는데, 감독은 한 개인이 왜 이 같은 광기에 물드는지보다 이미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개인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지의 문제에 주목한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128)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신은 아메드를 구원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메드가 자신의 종교적 근본주의를 극복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사회복지사나 심리상담사의 노력에도,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보이는 루이즈(Victoria Bluck) 조차도 아메드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자신을 좋아하면 이슬람주의자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루이즈가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화를 내는 장면은 희망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건, 다르덴 형제가 언제나 낙관적 결말을 보여줬다는 점 때문이었다. 불안불안한 아메드의 살인미수 현장을 보면서도 어떻게든 '괜찮은' 결말이 나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던 차에, 그 가능성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발생한다. 아메드를 지탱해 줄 것이라 믿었던 건물 지지대가 순간적으로 떨어져 나가고 아메드가 추락하는 찰나, 가슴이 덜컹한다.
'알라'가 아닌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 힘겹게 몸을 움직여 이네스를 해치려 손에 쥐었던 못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네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는 목소리는 너무 가냘펴서, 이전까지 종교적 신념에 찬 목소리의 아메드와 대조되어 더욱 간절하게 들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이 아닌 엄마를 부르고, 이네스 선생님에게 사과와 구조의 손길을 내미는 아메드는 변화한 것일까.
영화는 변화의 가능성은 죽음의 기로에 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비관과 동시에, 그럼에도 아직은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놓는 낙관을 결말을 통해 동시에 보여준다.
다르덴의 결말을 옹호하고 싶다
<아들>에서 아버지의 용서, <자전거 탄 소년>에서 아이의 변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동료들의 연대, <소년 아메드>에서 아메드의 변화의 가능성 등, 다르덴의 결말에 대해 누군가는 '나이브함'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낙관적인 결말이 나쁜 결말이 아닌 이유는, 그 결말 이전에 개인, 관계, 사회를 바라보는 치열한 시선 때문일 것이다. 쉽게 변화를 말하지 않고, 윤리적/도덕적인 딜레마와 모순적인 삶의 면면들을 충분히 보여준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기에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낙관. 엉망인 현실을 보면서도 그대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다르덴의 결말을 옹호하고 싶다.
다르덴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씬의 '동등함' 때문이다. <소년 아메드>에서 소위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순간은 장면 자체로 다른 씬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이네스에게 칼을 휘두르는 순간은 볼 새도 없이 지나가고 루이즈가 키스하는 장면, 결말에서의 추락의 순간조차도 장면은 강조되지 않고 평범하게 지나간다. 다르덴의 카메라는 어떤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에도 인물에 갑자기 다가가지 않으며 배경음으로 그 순간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현실에서 그런 순간이 갑자기 클로즈업되지 않는 것처럼, 오로지 한 쇼트로 따라가기. 오직 사후적으로 복기할 때만이 그런 순간들은 강조될 수 있는 것이다.
강박적으로 입 안과 코를 닦는 몸짓, 기도시간을 지키려는 조급한 걸음, 다르덴의 인물들은 결코 느긋한 법이 없다. 잰걸음, 불안한 걸음, 송곳 같은 말, 타인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눈빛. 아메드에게 평온은 찾아올 수 있을까.
유년과 성년 사이, 아메드를 13세 소년으로 정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때가 아니면 '가망없음'에 대한 감독의 인지일 것이다. 냉정한 현실을 인식한 채로 영화를 통해 희미한 긍정을 말하는 감독의 선택에 동조하며 아메드가 조금은 편안하게 걸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