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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Mar 04. 2018

오직 외로운 자들만이 - <셰이프 오브 워터>

-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의 또 다른 아름다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를 본 적이 없다. <퍼시픽 핌>도 <헬보이> 시리즈도 심지어 <판의 미로>도 나와는 인연이 없던 터라,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은 내가 처음 만난 그의 영화였다. 당연히 감독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샐리 호킨스 주연', '아가미 인간과의 사랑이라는 판타지 장르'라는 두 가지 정도의 호기심과 기대로 영화관에 들어갔다. 


샐리 호킨스는 역시나 약한 육체 이면의 강인함을 뿜으며 반짝반짝 빛이 났지만, '판타지 장르'에 대한 예상은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영화를 보기 전 내게는 물속을 유영하는 두 명의 육체가 이 영화의 대표적인 이미지였기에, 판타지적 이야기와 아름다운 영상미가 얼마나 조화롭게 구현되었는지 궁금했다. 


영상이 아름답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빈틈을 막아 물을 채운 욕실 장면, 영화의 마지막 바닷속 장면,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의 이웃이자 친구인 자일스(리차드 젠킨스)의 스케치 등이 말할 것 없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었다. 




외로운 자들의 이야기


그건 주인공 엘라이자를 비롯하여 양서류 인간(더그 존스/amphibian man_영화 엔딩크레딧에 이렇게 나오므로, '이상하게 생겼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괴생명체'라는 말 대신,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을 탈출시키고 보살피는 데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외로운 자들이다. 



가난한 화가이자 게이인 엘라이자의 이웃 자일스에게 유일한 친구는 엘라이자뿐이다. 사진이 그림을 대체하는 시대에 화가는 찬밥 신세일 뿐이고, 파이 가게 남자 종업원에게 관심을 표하자 종업원은 "여기는 Family Restaurant"이라며 정색하고 그를 내쫓는다. 


엘라이자의 동료인 젤다(옥타비아 스펜서)는 남편과 함께 살고 있지만 늘 뒤치다꺼리만 할 뿐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는 비겁하기까지 하다. 


소련 스파이로서 미 항공 우주국에 들어온 호프스테틀러 박사(마이클 스털바그)는 비늘로 뒤덮인 '괴물'이 지능과 공감 능력 등이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그의 해부를 막으려 한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도덕적 양심을 갖춘 과학자이면서, 스파이로서 철저히 고립된 존재인 그. 


엘라이자는 말을 못 하는 가난한 청소부다. 영화 속에서 양서류 인간을 전기고문하고 결국 해부를 지시하는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가 그녀를 대하듯, 장애를 가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 차별을 그녀는 외로이 감수해왔을 터다. 그렇기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시선,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모르는 눈빛"을 그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이다. 생애 처음 만나는 얼룩 없는 시선을 만났을 때의 환희. 이는 그녀가 양서류 인간을 사랑하게 되고,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그와 교감하며, 그를 탈출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가 된다(영화의 마지막에 그 둘의 사랑을 설명하는 또 다른 클루가 있는데, 스포일러일 수 있어서 패스!). 그녀는 그의 투명한 시선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처절한 외로움을, 그것이 처음에는 연민이든 공감이든 혹은 연대이든, 단번에 감각하고 그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인다. 


 <히든 피겨스>에서 미 항공 우주국 프로그래머였던 옥타비아 스펜서는 이번에는 그곳의 청소부가 되었다 :)


자일스부터 젤다, 호프스테틀러 박사, 엘라이자와 양서류 인간까지, 이들은 하나같이 외로운 존재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비록 가장 외롭지만 유일하게 '행동'하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임에도 다른 길을 택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들은 과감히 옳은 선택을 하고 행동한다. 처음에 엘라이자의 부탁을 거절하던 자일스는 파이 가게에서 쫓겨난 후 그녀에게 다시 돌아와 돕겠노라고 말한다. 자신은 물론 가게에 들어온 흑인을 쫓아내는 종업원을 보면서 자일스는 그녀를 도와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터다. 모든 존재는 피부색, 성 정체성, 장애 여부, 심지어는 괴물과도 같은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다르다는 이유로 억압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 명제를 스스로 실천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롭지 않기 위해 주변 상황에 섞여 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혹은 성공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악을 행하는 이들보다, 외롭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할 수 있는 강인함을 선택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고 쓰라리다. 하지만 오직 외로운 자들만이, 그것을 무기로 서로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생각이 든다. 반대로 말하면, 용기를 갖는 것은 외로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일 거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물 밖은 물론, 물속에서도 호흡하며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신비한 존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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