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트랜짓> 외
영화에서 '경계'라는 테마는 매력적이다. 물리적인 장소로서의 이곳과 저곳 사이, 과거와 현재 사이, 꿈과 현실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 어쩌면 대부분의 영화는 이 '사이'를 배회하거나 그 틈새를 들여다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계에 선 사람들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트랜짓>(2018)은 여러 층위의 '경계' 위에 서 있는 영화다. 주인공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 마리(파울라 베어), 리차드(고데하르트 기제)처럼 독일 나치를 피해 망명을 가는 이들에게 프랑스의 도시 마르세유는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는 장소이자, 동시에 육지와 바다의 경계다. 뿐만 아니라, 과거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이야기를 현대의 공간에 펼쳐내는 영화의 구조는 이 영화를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 아슬하게 서 있게 하고, 또한 이러한 '현재성'이 지금의 난민문제와도 공명하면서 여러 개의 결로 겹쳐진 '경계'의 그물에 빠뜨린다. 이 때문에 비교적 단순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다양한 층위의 풍성한 감상을 남긴다.
어찌 보면 '경계' 또는 '사이'라는 말은 다시 말해 이쪽도 저쪽도 아닌, 꿈도 현실도 아닌, 과거도 현재도 아닌, 발 디딜 곳 없는 '장소없음'의 공간 또는 상태다. 영화 속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은 어딘가로 가기 위해 필사적이지만 결국은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다소 생뚱맞게 들리는 음악은 알고 보니 토킹헤즈(Talking Heads)의 <Road to Nowhere>였다. 애초에 이들에겐 도달할 곳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 Road to Nowhere 뮤비 >>
https://www.youtube.com/watch?v=LQiOA7euaYA
이 주제는 펫졸트의 2012년작 <바바라>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1980년대 독일 통일 이전, 서독으로의 이주를 신청했다는 이유로 당국 슈타지의 감시를 받는 의사 바바라(니나 호스)는 동독과 서독의 경계에서 불안정하게 살고 있다. 유능하고 자존감이 높은 의사지만 시민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전체주의적인 동독 사회에서 그녀는 행복해질 수 없다. 친절한 동료 의사 안드레(로날드 제어펠트)와의 관계 역시 마지막까지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트랜짓>과 <바바라>에서 경계를 배회하는 인물들에게 진정한 평온은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남겨지는 이들의 희미한 미래만 짐작할 수 있을 뿐, 떠난 자들의 소식은 아예 되돌아오지 않거나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바바라>에서 몰래 바다를 건너는 소녀는 서독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을까. <트랜짓>에서 마리와 리차드는 정말 배에 탑승한 걸까.
독일의 '역사적 트라우마'는 어떻게 재현되나
크리스티안 펫졸트가 독일의 비극적인 역사를 영화 속에서 재현하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앞서 이야기했듯 <트랜짓>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아무런 설명 없이 태연하게 현대를 배경으로 풀어내는 이야기 구조는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과거를 과거로 남겨놓는 대신 현재에 적극적으로 개입되도록 한다. 아름다운 지중해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 마르세유의 푸르고 현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물들의 말 또는 일련의 상황('봄의 대청소'가 곧 시작된다는 말, 경찰들의 불심검문, 계속되는 떠남의 실패 등)을 통해 과거의 역사가 불쑥 튀어나올 때 멈칫, 하고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재현의 방식은 <피닉스>(2014)에서 더욱 분명했다. 유대인 가수 넬리(니나 호스)는 나치수용소에서 탈출하지만 폭격으로 얼굴을 심하게 다쳐 성형수술을 하게 된다. 퇴원 후 남편인 조니(로날드 제어펠트)가 일하는 술집 '피닉스'에 찾아가지만 아내가 죽었다고 믿는 조니는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나치에게 빼앗긴 아내의 재산을 가로챌 생각으로 아내를 닮은 넬리에게 접근해 자신의 아내 역할을 해 줄 것을 제안한다.
사람들과 재회하는 순간을 사전 연습하던 중 넬리는 수용소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이야기하지만 넬리가 절대 아내가 아니라고 믿는 조니는(넬리는 조니에게 자신의 이름을 '에스더'라고 소개한다) "그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묻는다. 화장을 하고 원피스를 입은 모습으로 수용소에서 돌아오는 사람은 없다는 넬리의 말에 조니는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고 고집한다. 아무도 수용소에서의 '진짜' 일은 물어보지 않을 거라면서.
진실이 거짓(연기)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대화 속에서 불쑥 드러나는 그 날의 끔찍함, 당사자가 아닌 이들의 피상적 위로와 이를 견뎌야 하는 고통까지. 수용소를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보다 이런 말속에서, 상황의 아이러니 속에서 드러나는 '역사의 재현'은 우리를 더욱 깊이 찌른다. 영화 내내 구축된 말과 감정은 마지막 장면에서 고요히 정점을 찍는데, 그야말로 손에 꼽힐 만큼 아름답고 아픈 결말이다.
우리 모두는 난민일 수 있다
주제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트랜짓>에서 게오르그와 드리스(릴리엔 바트만)가 우정을 쌓는 장면들은 영화에 온기와 아름다움을 더한다. 특히 드리스의 집에서 라디오를 고치고,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게오르그가 서툴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선율이지만 '집으로 돌아가고픈' 이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노래. 노래를 부르는 게오르그도 노래를 듣는 드리스도, 노래를 '보는' 드리스의 엄마 멜리사(마리암 자리)도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알기에, 그 순간, 그 장면은, 그들에게도 그들을 보는 우리에게도 특히나 소중한 시간이다.
영화 속 드리스와 멜리사는 영토의 한 곳에서 게토처럼 살아가는 난민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떠나고 새로 집을 차지한 대가족의 등장은 이를 더 잘 보여주는 이미지다. 게오르그와 드리스의 만남과 갑작스런 헤어짐은 우리 모두가 잠시 머물러 있는 자로서, 이 시대에 '우리 모두는 난민일 수 있다'는 말을 상기시킨다(최근 개봉한 연상호의 <반도>만 보아도 이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큼 믿고 환대할 수 있나. 반대로 서로를 얼마큼 경계하고 서로에게 실망하며 살아가야 할까. 아이지만 온전히 아이로서 살 수 없는 아이, 누군가에게는 사람과의 관계맺음이 상처라는 걸 알게 되는 아이, 그리고 아름답게 수화를 하는 아이는 '연대'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펫촐트의 영화는 세 편을 본 게 다지만 공통점을 찾을 수는 있었다. 멜로드라마 장르를 차용한 비교적 단출한 스토리, 이야기 자체는 단순화하되 형식적인 장치나 예상외의 순간을 통해 역사, 정치, 사회적인 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실존의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감독. 행위의 목표는 단순하지만 그곳에 다다르기까지 수많은 고뇌와 감정을 통과해야 하는 영화들. 다른 작품들도 챙겨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