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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Jan 22. 2020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야 해요?
<미안해요, 리키>

영국의 사회문제에 현미경을 들이대 왔던 감독 켄 로치의 신작 <미안해요, 리키>가 개봉했다. 줄곧 심각하고 마음이 무겁다는 리뷰를 봤던 터라 다르덴 형제 영화급으로 너무 힘들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섰다. 마음의 준비를 했던 탓인지 생각보다는 유머와 따듯함이 묻어있는 영화였지만,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는 노장 감독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신자유주의 속 영국 또는 우리의 이야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다니엘(데이브 존스)의 힘겨운 여정을 통해 영국 공공 시스템의 관료화와 모순을 들여다봤다면, <미안해요, 리키>는 배달노동자에게 소위 '자영업', '프리랜서'라는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 얼마나 겉만 번지르르한 허울뿐인지, 얼마나 복잡한 모순과 거짓말을 담고 있는지를 파헤친다. 감독은 영국의 복지 시스템과 '긱 경제 노동자'라 불리는 다분히 신자유주의적 고용관계의 이면을 다니엘 또는 리키(크리스 히친)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 면밀히 보여준다.  


대기업의 수주를 따기 위한 택배사들의 경쟁, 이동하는 모든 루트를 트래킹하는 총(gun)이라 불리는 손 안의 기계, 그 무엇도 보장되지 않지만 간섭과 제재 하에 있는 회사와 노동자의 고용관계 등등.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인간성의 파괴, 가족의 불화, 그럼에도 죽음의 문턱까지 밴을 몰도록 부추기는 이 망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어두운 이면. 


낯선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너무 우리 이야기 같아서 그게 낯설 정도다. 



희망의 끈은 가족, 하지만...


택배 회사 관리인 말로니(로스 브루스터)가 무한 경쟁의 시스템 속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물의 표본이라면, 켄 로치 감독이 그나마 희망의 끈을 남겨두는 곳은 리키와 그의 가족이다. 복지사인 리키의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는 남편의 택배 배달용 밴을 사기 위해 자가용을 팔고 멀리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는 수고를 감수하지만, 자신이 돌보는 이들을 가족처럼 보살핀다는 원칙만은 최대한 고수하려 한다. 화를 잘 내는 남편과 말썽을 일으키는 아들 세브(리스 스톤) 사이에서 현명한 중재자 역할 역시 애비의 몫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 역시도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9시까지 일하며 건별로 임금을 받는 처지니 그 삶이 쉬울 리 없다. "하루 8시간 노동이 원칙 아니냐"는, 애비가 돌보는 노인의 말은 공허하다. 


사춘기 아들 세브는 대학을 가봤자 엄청난 빚에 변변치 못한 직업을 얻고 결국은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술에 빠져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학교는 제쳐두고 그래피티에 빠져있다. 친한 친구가 학교에선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서도 마음 둘 곳이 없어 다른 도시로 도망치듯 가버리고 나서부터는 점점 더 말썽을 피운다. 영화 초반 동생 리자와 영상을 보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은 후반부로 갈수록 과격하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해간다.

딸 리자(케이티 프록터)는 가장 어리지만 속이 깊고 똑똑하다. 리키의 택배일을 도우며 팁을 받고, 학교를 가지 않겠다며 침대에 누워있는 오빠 세브를 끈질기게 일으켜 세우려 한다. 부모님의 보살핌이 부족해도 의연하게 견뎌내는 건 세브가 아니라 리자 쪽이다. 하지만 점점 커가는 리자가 이 위태로운 가족을 계속해서 품어낼 수 있을지는 쉽게 자신할 수 없다.


영화의 중반부 영화에 숨통을 틔워주는 저녁 식사 장면. 인도 음식을 먹으며 모처럼의 여유와 즐거움을 가져보는 가족의 시간은 애비의 울리는 전화로 한 번 덜컥, 이후 차에 다른 사람을 태워선 안 된다는 말로니의 경고로 또 한 번 덜컥, 브레이크가 걸린다. 


Sorry, we missed you

영화의 마지막 장면의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택배 배달 중 예기치 못한 일로 심하게 다친 리키는 벌점과 벌금이 무서워 가족 몰래 집을 나선다. "미안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 라고 쓰여진, 고객이 부재중일 때 남기는 택배 메모 종이에 "나는 괜찮다"며, "화내지 말라"는 메모를 아내에게 남긴 채로.  


뒤늦게 따라 나온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처 난 얼굴과 퉁퉁 부은 눈, 부러졌을지 모르는 손가락으로 밴을 몰아 일터로 향하는 리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에 생채기가 난다. 다분히 고객 중심으로 쓰인 "Sorry, we missed you"라는 글귀는 이 세계의 풍경을 집약한다. 누가 누구에게 미안하다는 것일까. 이 말은 정작 누구에게 향해야 하는가. 


위태롭고 허망하게 끝을 맺는 영화를 생각하며, 리키에게 이 말을 되돌리고 싶다. 


당신을 놓쳐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농담과 축구를 즐기던) 당신이 '그립다'고. 




* 최근 비전문 배우들과 작업하고 있는 켄 로치 감독. <미안해요, 리키>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완벽하다곤 할 수 없지만 알려지지 않은 얼굴에서 오는 현실감과 호소력이 이 영화를 우리 곁으로 한 발짝 가까이 가져다 놓는다는 생각. 


*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선균 저리 가라 하는 세브의 목소리... (어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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