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이 지나고 다음 계절이 찾아온다
밤새 술을 마시다 새벽 첫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술자리 초반에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시간이 훌쩍 지나지만, 새벽 3-4시 즈음이 되면 이미 집에 돌아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가난한 대학생 시절에 택시는 사치. 과방에서, 동아리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첫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첫 차에는 건물 청소 등을 위해 출근하시는 아주머니, 아저씨들로 가득하다. 하루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방향의 삶을 사는 죄책감은 전날의 즐거움에 대한 대가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 죄책감이 술을 마시면서 나누는 진솔한 이야기나 흥, 사람들과의 친밀감 등을 상쇄할 정도는 아니어서 다음날 또다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땐 그랬다.
이제는 다음날 하루를 망치는 숙취 때문에라도 흥에 겨워 마무리하지 못하는 술자리는 되도록 없애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아 거기까지만 마셨어야 했어!' 라며 후회하는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맛'있는 술을, '적당히'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됐으니 큰 문제는 없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세 명의 주인공 나(에모토 타스쿠)와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소메타니 쇼타)는 줄곧 마시고 논다. 밤새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 술과 피곤에 취한 주인공들을 보자 새벽녘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의 내 모습과 감정이 떠올랐다.
영화는 줄거리 대신 정서로 말한다. 여름밤의 공기, 끈적함, 어디선가 풍기는 것만 같은 술냄새, 새벽녘의 피곤함, 관계의 불안함, 동시에 주어지는 자유로움 등, 그 분위기와 공기를 느끼는 것이 중요한 영화다. 그걸 느끼다 보면 주인공들의 불안함에 함께 흔들거리다가도 그들의 자유로움이 사무치도록 부러워지기도 한다.
"이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9월이 되어도, 10월이 되어도."
여름은 청춘에 대한 은유다. 진부해도 어쩔 수 없다. 초록이 짙고 무성한 여름은 직관적으로 청춘의 에너지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름이 마냥 푸르르기만 한 것은 또 아니다.
바닷가 도시 하코다테에 사는 세 친구의 여름은 강렬하고도 무기력하다. 얼음을 아작아작 씹어먹을만큼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얼음을 얼리는 냉동실 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 자꾸만 열려버린다. 모든 것을 다해 밤새 춤추고 놀지만 내일은 불투명하고 관계는 모호하다. 냉장고는 언제 고칠 줄 모르고, 결정은 미뤄진다.
의도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 흘러가게 두는 것. 청춘의 특권인 동시에 무엇도 결정할 수 없는, 결정이 허락되지 않는 시절을 살아간다.
"질척대는 관계는 싫어."
사치코가 말하고 '나'는 동의한다. 사치코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줄곧 다른 사람에 대해 묻는다. 시즈오에 대해, 이별 중인 서점 점장에 대해. 연인 사이는 나와 사치코인데, 영화는 사치코와 시즈오만을 담는 프레임이나 둘의 대화를 듣는 나의 묘한 얼굴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인다. 나와 사치코의 달달한 만남과 얼마 후 시즈오와의 만남, 그리고 셋의 모호한 관계가 영화의 꽤 초반부터 시작된다.
누군가를 누군가에게 귀속시키지 않은 채 자유롭게 흘러가는 시간은 매력적이다. 그중 7분에 달하는 클럽씬은 단연 독보적. Hi'Spec의 비트와 클럽 안 푸르고 어두운 조명에 푹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피곤한 새벽이 찾아온다. 찬란하고도 고된, 청춘.
https://www.youtube.com/watch?v=AvSyfEh-MS4&list=PLQONWrLA2fNzsqepsMJ2JgzUjgAZSraJz
이후에도 셋은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은근히 질투가 나면서도 나는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일부러 막아서지 않는다. 술에 취해 시즈오가 사치코에게 "영화 보러 가자"고 하자 나는 사치코에게 그러라고 하고, 캠핑이 끌리지 않는 나는 사치코와 시즈오 단둘이만 가는 캠핑도 말리지 않는다. 하고 싶으면 하는거지. 어떻게든 될거야.
기어코 여름은 끝나고 다음 계절이 찾아온다
하지만 끝날 것 같지 않던 이들의 여름도 기어코 끝을 보인다. 지병이 있는 엄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시즈오는 밤새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 병원으로 향한다. 끝내 쿨할 것 같았던 나는 사치코와의 첫 만남을 떠오르게 하는 이별의 순간, 그녀를 맹렬히 쫓아간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걸이가 이 영화 전반의 정서라면, 마지막 나의 필사적인 달리기는 돌출적이다.
결정을 유예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이들의 여름은 끝나고 영화도 끝을 맺는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다음 계절 앞에서, 이들의 시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갈 것이다.
보편의 청춘, 보편의 시대
"동시대의 청춘이 가진 어떤 속성보다는 보편적인 청춘을 담아내고 싶었다"(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2980)는 감독의 말은 영화에 '시대'적 담론보다는 '청춘'에 방점이 찍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말은 일본뿐 아니라 '재난'의 시대를 사는 동시대 청춘의 모습을 영화 속에 중첩시킨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거나, 계속되는 실직 상태의 삶을 사는 것. 결정을 미루고 길거리를 방황함으로써 지금을 버텨내는 삶. 자유롭고 찬란하지만 그 에너지가 줄곧 허무와 무기력함으로 빠져 들어가는 영화의 정서는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는 동시대의 풍경을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어쩌면 이건 '청춘들'만의 보편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지막, 사치코에 대한 '나'의 고백은 무기력에서 빠져나오려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보인다. 동명의 원작소설 속 결말과는 달리(소설은 살인사건으로 끝이 난다고 한다),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는 것 같은 결말에 왠지 안도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