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아씨들>부터 <찬실이는 복도 많지>까지
확실히 여성영화가 강세다. 굳이 '여성'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 분류할 필요가 있겠나 싶다가도 드러나지 않았던 이름을 굳이 호명하는 것은 분명 효과가 있다. 2018년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이었던 케이트 블란쳇을 필두로 전 세계 여성영화인 82명이 레드카펫 위를 걸었던 이미지는 강렬했다.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af7df84e4b00d7e4c1b4d10)
국내외 영화제에서 여성감독의 영화 상영 비율을 계속해서 높이려는 노력, 극장과 여타 플랫폼에서 여성감독과 여성의 이야기가 많아지고, 관객 또한 그 이야기에 호응하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조금씩 선순환의 파장을 만들고 있는 듯하다.
비단 성별의 문제를 넘어서 인종, 세대, 계층 등의 다양성이 예술의 영역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예술을 얼마나 더 풍요롭게 하는지 새삼 생각한다.
작년에 본 영화 베스트에 꼽을 만한 <벌새>를 비롯해서 인상 깊게 보았던 <아워 바디>, <밤의 문이 열린다>, <보희와 녹양>, 부산영화제 때 보았던 유머와 엉뚱함, 건강한 에너지로 가득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코로나 사태 속에서 3월 5일 개봉했다. 찬실이는 정말 참 복도 많지...), 많은 이슈가 있었지만 한국사회 여성의 삶을 대중영화의 틀로 보여주었던 <82년생 김지영>까지, 각각의 영화가 비슷한 느낌이 전혀 없을 만큼, 다양한 내용과 장르를 넘나들어 새롭고 깊은 영화들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을 아직도 못 봤네...)
해외영화를 떠올려보면 단연 <결혼 이야기>고(감독은 노아 바움벡, 남자지만 여성/남성의 입장과 이야기가 균형 있게 잘 담겨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뒤늦게 본 아녜스 바르다 할모니의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유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동감이 넘친다. 올해 본 <작은 아씨들>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말하면 입 아프게 아름다운 영화다.
아, 제목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 같다. 단지 여성의 이야기고 여성이 등장한다고 영화가 좋아지는 건 당연히 아니다. 무엇이 이토록 이 영화들을 매력적으로 만들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예술가로서 삶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썼다. <작은 아씨들>에서 볼 수 있듯 여성에겐 결혼만이 거의 유일한 '경제활동'이던 시절이 있었다. 재능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낼 수 없었고, 재산이 있더라도 결혼을 하면 그 재산은 남편의 소유가 되었다. 그 속에서 조(시얼샤 로넌)는 결혼이 아닌 자기만의 공간에서 글을 써 나간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당시 여성에게만 금지된 누드화에 대해 말한다. 또한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인 소피(루아나 바야미)는 그들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끽한다. 18세기 후반 무렵, 결혼할 남자에게 초상화를 그려 보내야 하는 전통과 금지된 것(누드화, 동성 간의 사랑, 낙태)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영화를 조용히 감싼다.
'누벨바그의 어머니'라 불리는, 60년이 넘도록 예술을 직업으로 살아온 아녜스 바르다의 삶은 또 어땠을까. 그녀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를 아우르는 다큐멘터리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보면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도 마르지 않는 그녀의 호기심과 아이디어, 사람에 대한 관심, 연민, 그리고 장난기에 감탄하게 된다.
물리적, 정신적으로 '자기만의 방'을 만들었던 영화 속, 영화 밖의 여성들.
삶의 기운, 생기(生氣) 있는 여성들
<작은 아씨들>에서 네 자매와 어머니(로라 던)는 가난하지만(사실 그렇게 가난해 보이진 않는다 ㅎ) 결코 비루하지 않다. 더 가난한 이웃과 음식을 나누고 부유한 이에게 기꺼이 도움을 받는다. 춤추고, 떠들고, 끌어안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성에게도 이성과 영혼, 야망이 있다고, 여성에겐 사랑이 전부란 이야기는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조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 역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첫째 메그(엠마 왓슨), 평범한 재능을 가질 바엔 아예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야망가 막내 에이미(플로렌스 퓨), 죽음 앞에서도 조의 글쓰기를 응원하는 베스(엘리자 스캔런), 그리고 자신과 네 딸의 삶을 훌륭히 지지하는 엄마까지, 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삶의 기운으로 넘쳐난다. 그 생기가 유년시절에 국한되고 그 시간이 다 끝나버렸다 느껴지는 순간에도, 이어질 다음 생을 향해 다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삶의 에너지. 좌절과 상실의 삶 속에서도 한 줄기 위로와 건져 올릴 삶의 의지를 기어코 보여주려는 이 영화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통해 보는 아녜스 바르다의 생기는 두 말할 것도 없다. 시간이 흘렀고 나이를 먹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삶이 허락하는 한, 그녀는 걷고 찍고 말하고 또 웃는다.
한국영화로 오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강말금)이가 있다. 영화 프로듀서인 찬실은 오래 함께 일하던 감독의 돌연사로 실직자 신세가 된다. '결혼은 못해도 영화는 계속할 수 있을 줄' 알았던 터라 타격이 크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는 찬실의 모습이 우울하지만은 않다. 돈은 일을 해서 벌어야 한다며 친한 배우의 가정부 일을 하고, 프랑스어 과외 교사한테 홀라당 빠져 버리고, 주인집 할머니와는 시를 읽고, 환영처럼 등장하는 '장국영'을 만나 고민 상담을 한다. 상황은 절벽이지만 이야기는 경쾌하다.
한편, <벌새>, <82년생 김지영> 등의 영화 속 여성은 생기보다는 고요한 이미지에 가깝다. 하지만 그녀들을 계속 보고 싶고 그녀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건, 현실 속에 무력하게 휩쓸리기보다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내면의 욕망에 눈 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에 현실의 어떤 모습이 묵직하게 구현되어 있어 표면적인 생동감은 덜하지만, 현실을 일단 받아들이고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다시 삶의 의지를 다져나가는 인물들을 볼 때, 기저에 꾸물대는, 곧 땅을 뚫고 나올 생명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명랑해질 노력"
씨네 21 김소미 기자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고 나면 "조금 더 명랑해질 노력, 슬플 때 웃거나 절망스러울 때 다시 경건하게 자세를 고쳐 잡는 전환의 노력을 따라 하고 싶어진다"(씨네 21 No. 1245)고 썼다. 명랑하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찬실의 명랑함을, <작은 아씨들>의 생기를 동경하게 된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쩌면 노력의 산물임을 생각한다. 가라앉는 마음을 자꾸 일으켜 세워보기. 그것이 비록 표면적인 소란함이나 수다 같은 걸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마음을, 생각을 명랑하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 힘을 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