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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Feb 08. 2020

건물주가 부럽지 않으면 이상한 건가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라는 게 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졌다.

잘 치워둔 책상에 앉아 잔잔한 연주곡을 틀었다. 

때마침 찾아온 적당한 허기.. 냉동실에 얼려둔 스콘을 데워 따뜻한 커피를 곁들였다. 요 며칠 불안으로 휩싸였던 날들을 기분 좋게 중단하는 충만한 행복감.. 무엇을 더 바랄까.. 난 그저 이 정도의 여유와 자유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침대와 책상, 옷들이 겉으로 다 드러난 옷걸이 정도가 살림의 전부인 단출한 내 원룸. 남편이란 존재가 있었던 그 시절 한 때는 하루빨리 강남 3구에 집을 사야 한단 목표 하나로 달렸던 그때의 나는 이 작은 원룸에서 벌써 4번째 해를 맞고 있다. 이따금 외롭지만 그러나 아주 자유롭고 행복하게..


실내외 온도차로 부옇게 서린 창문 틈으로 부드러운 햇살이 비집고 번져왔다. 따뜻한 김이 오르는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다 문득 얼마 전 친구를 속상하게 한 일이 떠올랐다.


지방이긴 하지만 친구는 건물 몇 채를 소유한 재력가였다. 반 이상이 은행 대출이라고는 하나 나이 마흔에 부동산 임대업의 부담을 감당할 배포도 가졌으니 몇 년 후면 정말 거부가 될 만한 잠재력도 가진 것 같았다.


"빛 좋은 개살구지.. 일하면서도 내내 세입자들 전화받느라 정신없는 날 보면 내가 대체 뭐 하고 사는 인간인지 모르겠다."


통화만 하면 친구는 늘 죽는소리를 해댔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하게 늘어지는 돈걱정을 들었다. 마흔 개 정도의 룸을 관리하는데 마지막 한 두 개가 주인을 찾지 못하는 상황.. 받지 못한 월세는 고스란히 친구의 걱정으로 쌓여갔다.


"오늘 참 기분 좋다. 방 하나가 계약됐어."


열흘이면 열흘 다 죽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던 친구는 마지막 남은 방이 계약됐다며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참 단순하다. 너도.."


왜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상대의 기분은 생각도 안 하고 늘 죽는소리만 늘어놓던 친구에 대한 소심한 복수의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친구는 내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았는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무언가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에게 곧 미안하단 사과의 톡을 전했다.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사실 내 생각은 정말 그러했다. 한 달 내내 죽상을 면치 못하던 친구를 웃게 만든 이유가 고작 월세 30만 원이라니.. 그것도 건물을 몇 채나 소유한 그여서 더욱 아이러니했다. 


모락모락 김을 올리던 커피가 서서히 식어갈 즈음 그의 모습 속에서 몇 년 전의 내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그때의 나도 그랬으니까.. 꿈보단 연봉을 쫒았고 소소한 감동보다 통장에 꽂히는 단 얼마의 돈이 더 좋았으니까.. 삶이 한 번 제대로 무너진 후 지금의 삶은 덤으로 얻은 기회라는 생각이 있기 전까진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부자를 보면 무조건 배척을 하고 보는 지인도 있다. 

젊어서 사업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는 그는 가지지 못한 그룹을 '우리'라 칭하며 늘 "우리끼리 뭉쳐서 살면 된다"라고 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그의 입에 붙어있는 그 말도 현재 가지지 못한 처지에 놓인 내게 편히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분명한 구획을 그어놓고 스스로를 자위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될까? 가지지 못한 자도 결국은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위해 꾸물꾸물 움직일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진 동물이라는 걸 인정하고 말 일인데.. 결국 답은 없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묵묵히 살아갈 뿐.. 인생이 와르르 무너져보지 않은 자, 경쟁이 필수인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아직은 큰 흠없이 유유히 길러진 자, 온 마음을 바치던 일이 단 얼마의 돈에 해결된 허무함을 맛본 상처 받은 자, 그들을 웃게 하는 가장 큰 힘은 돈에서 나온다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시대.


그치만 친구야, 잔뜩 힘이 들어간 몸에 조금 여유를 줘 보는 건 어떠니? 

얼마간의 돈을 위해 네가 포기해야 하는 지금, 이제 얼마나 더 젊은 신체로 살아갈지 모를 우리 마흔에 포기해야 하는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 네가 그 작은 행복들을 볼 수 있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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