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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이 Oct 22. 2019

나는 푸른 선만 따라갔다

어쩌다, 수영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목요일 저녁이었다.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3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여느 식상한 드라마의 클리셰 같은 장면들처럼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이라는 핑계로, 아기가 보챈다는 핑계로 수영을 3주나 거르는 사이  내 인생을 지켜보는 이름 모를 시청자들은 모두 쯧쯧 혀를 차며 예상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허리에 '번쩍'하고 번개가 내리쳤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느낌. 전기가 허리부터 발 끝까지 내리 꽂히는 느낌, 아. 디스크가 있는 사람만 아는 그 지긋지긋한 통증이 몰려들었다.


  집에 오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통증으로 볼 때 이건 견적이 최소 석 달짜리다. 당장 부산 출장도 있다. 이 허리로 KTX를 어떻게 탈 것이며, 내일은 한 달 전부터 이야기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 놓고 기다리던 수영인 J씨와의 점심 약속도 있었다. 부산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일 출근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점심 약속이 어려울 것 같다고 보낸 문자에 J 씨는 사려 깊게도 이렇게 답을 보냈다.


  "아휴 괜찮아요. 정말 예측 불허인 세상이잖아요."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여, 스마트폰을 쥘 기력이라도 남아있다면 잠시라도 몸에 귀를 기울여 보시라. 우리가 애써 외면할 뿐 우리 몸은 듣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비명을 질러댈 때가 있다. 타이어처럼 나온 뱃살에 허리가 무너져 내린다 외쳐대도 스트레칭 한번 하지 않으며, 발가락이 숨을 못 쉬겠다 비틀거리는 지경에 이르러도 신발을 바꿔 신지 않는다. 위가 쓰라려 올 때까지 매일 밤마다 조금씩 털어 넣는 와인은 또 어떤가. 거울에 비친 내 몸이야 말로 또 온몸으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무리 예측불허인 세상이라지만 어째서 내 몸까지 이렇게 예측불허가된 걸까.


  거울 속 상체는 곧은 일자가 아니라 하반신과 연결된 허리를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있었다.  흔히 '보상성 측만'이라고 하는데 허리에 극심한 통증이 오면 몸이 스스로 그 통증을 피하기 위해 반대쪽으로 완전히 휜다. 정확히 1년 반 전 출산 직후 디스크가 찾아왔을 때 그때 그 모습이다. 뒤틀린 척추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심지어 수영을 할 때도 그대로 드러났다. 배영을 할 때 머리 위에서 내가 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록 쌤은 보통 머리와 일직선으로 퐁퐁 튀는 발차기 물보라가 보이기 마련인데 나는 그 물보라 조차도 틀어져있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비틀어져 있던 게 어디 내 척추만이었을까. 다시는 내 몸 돌보지 않고 일만 하고 살지 않겠다고, 쓸데없는 힘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1년 만에 또다시 이렇게 반성의 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내 몸이 수영조차 금지할 때,  그래서 우울한 마음이 지각을 뚫고 지구의 중심까지 파고 들어갈 때는 역시 남들이 운동하는 이야기로 대리만족하는 '방구석 수영'이 제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모든 러너와 수영인, 뭐든 한 가지 운동에 미쳐있는 사람들에게 읽고 또 읽어도 큰 위로가 되는 책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그 하루키라도 일개 아마추어 마라토너로서 겪는 좌절과 성취, 분노와 해탈이 채 3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책 한 권에 다 녹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라면 생각도 못할 '허리 디스크를 위한 요양 휴가'를 결연히 신청하고 침대에 누워 책을 펼쳐 들었다. 하루키 씨는 '네가 또 그 모양 그 꼴로 살다가 허리를 다칠 줄 알았다'는 듯 보스턴 마라톤 준비가 한창이던 때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번엔 보스턴의 찰스 강변을 달리는, 포니테일을 한 젊고 팔팔한 하버드 여자 신입생들에게 추월당하는 이야기다.


  이른 아침 찰스 강변을 내 페이스로 달리고 있노라면, 하버드의 신입생처럼 보이는 여자애들에게 점점 추월당한다. 그녀들 대부분 날씬하게 마른 작은 몸집에, 하버드의 로고가 붙은 붉은 벽돌 셔츠를 입고 있다. 금발의 포니테일로 묶고, 신제품의 아이팟을 들으면서, 바람을 가르듯 일직선으로 도로를 달려간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알지 못할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것이 느껴진다. 사람들을 차례로 추월해가는 것에 그녀들은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추월을 당하는 것에는 아마도 길들여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은 한눈에 봐도 우수하고 건강하고 매력적이고 진지하며, 그리고 자신에 대한 확신에 차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내 자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들은 아직 그런 아픔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지금부터 굳이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들의 유유히 흔들리는 자랑스러운 포니테일과 호리호리한 호전적인 다리를 쳐다보면서 나는 하릴없이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페이스를 지키면서 느긋하게 강변도로를 달린다.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p.143~145>



  나는 다시 수영장의 맨 끝 초급 레인으로 돌아갔다. 레인을 넘나들며 돌핀킥을 연습하고 물을 잡고 턴을 하던 시간을 잠시 내려놓고 마치 이제 막 일흔 살이 된 것처럼, 할머니들과 함께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통증의 외침이 잠시 잦아들면 물 위에 다시 몸을 둥둥 띄웠다. 제 몸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 일만 해온 나귀를 토닥이듯, 물속에서 나에게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했다.


  허리가 틀어져도 괜찮아. 물을 제대로 잡지 못해도 괜찮아. 포니 테일로 머리를 묶고, 경쾌하게 지축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20대가 더 이상 아니라도 괜찮아.


  나는 누군가를 추월하는 대신 내 속도로 물속에 곧게 뻗은 푸른 직선을 따라갈 작정이다. 삶에는 정말로 기준선이 필요하다. 제멋대로인 몸뚱이는 늘 그 기준선을 넘어가며 곡선을 그려댄다. 일과 쉼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던 걸까. 그 선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가파른 절벽으로 헤엄치고 있던 것일까.


  물속에서 나는 그저 바닥의 푸른 선을 따라갔다. 옆 레인을 곁눈질 하지도, 내가 지금 어디쯤 와있는지 의식하지도 않은 채 그저 푸른 선을 따라 느리지만 묵묵히 헤엄치는 중이다.


  그리고 수영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숨이 차오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쉬지 않고 여러 바퀴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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