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천동잠실러 Jan 17. 2023

"팀장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육아휴직 하겠습니다.

2023. 1. 17. (화)


육아휴직을 속으로 고민하는 아빠들이 꽤나 많을 것이다. 나도 수개월을 고민했고.


일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속한 팀의 상황도 보고 인수인계가 가능한 상황인지 소위 각(?)을 보아야 하고, 재정적인 측면에서는 휴직기간 동안 확보 가능한 재정과 지출 예상액 등을 계산해서 실제 휴직 시 적어도 생활에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지 확인을 해야 한다. 그리고, 무작정 휴직하기 전에 아내와 충분히 논의하고 고민해서 실제 아빠 육아휴직 시 서로 어떤 계획과 소망이 있고, 매일 어떤 생활리듬을 가져갈지도 미리 논의를 해보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위 내용들을 모두 확인하고 휴직을 마음속으로 최종 결정하는 것과는 별도로, 실제 회사에서 팀장이나 실장에게 입밖에 '휴직'이란 말을 뱉는 데까지는 또 한 달이 걸렸던 것 같다. 아빠 육아휴직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동료로서 매일 전쟁터와 같았던 곳'잠시 떠나겠다'는 말을 하기가 꽤나 힘들었다.


혹시나,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해서 일적인 측면에서의 내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고민하는 아빠들에게 하나의  참고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기업 법무실 소속 해외 변호사다. 회사가 해외 매출이 많아 업무가 정말 많고 바쁜 편이었다. 코로나로 잦은 해외 출장은 피했지만, 회의가 하루에 많으면 5~6개씩 잡히고 메일도 많은 날에는 수십 개가 쌓여있곤 했다. 하루종일 회의를 끝내고 틈나는 대로 계약 검토와 자문을 하며 전화와 메일에 응대하다 보면 순식간에 저녁 시간이었다. 운 좋게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고도, 해외 업무의 특성상 밤부터 새벽에 추가 메일이나 conference call 요청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아내에게 '폰 그만 보라'고 혼나곤 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내가 휴직을 하면 다른 팀원들에게 엄청난 업무 부하가 예상되는 상황이었기에, 회사 차원에서도 계획을 수립할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해서 휴직 의사를 일찍 통지했다 (회사 내규에 따르면 2주 전에만 알리면 된다). 예상 휴직일보다 2개월쯤 전에 팀장님께 넌지시 말씀드리는 방식이었다.



나: "팀장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팀장님: "왜 그래. 불안하게.."

나: "저 1년 간 육아휴직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팀장님: (좌절)


미국 출장에서 복귀하신 법무실장님도 출근하시자마자 바로 나를 호출하셨고, 단도직입적으로 육아휴직이 아닌 다른 대안은 없는지 물어보셨다. 주 3일 근무, 재택근무 등등 원하는 것은 최대한 맞춰주겠다며 일종의 회유(?)도 하셨지만 나는 모든 결정이 끝난 상황이었기에 완곡하고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그 이후에는 일사천리였다. 팀장님은 바로 인사팀과 회의를 하셨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사팀에서도 내 업무량이 과도했다는 점을 인정하여 육아휴직 대체인력이 아닌 신규인력을 편성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고 했다. 사실, 회사에서 내 업무가 과도했다는 것을 이리도 쉽게 인정하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는 조금 벙 쪘지만, 어쨌든 내 육아휴직이 팀 차원에서 인력이 충원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미안함을 덜었다.


결과적으로, 육아휴직 의사를 일찍 통보한 것은 이래저래 잘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물론, 육아휴직 의사를 일찍 말하는 게 휴직자 입장에서 좋은 점은 딱히 없다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막상 휴직은 아직 멀었는데, 매 업무에 대한 향후 인수인계 계획을 미리미리 세우고 공유해야 했기에 실제 업무는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약간 후회스럽긴 했으나, 빚지고 못 사는 내 성격에는 차라리 나았던 것 같다.


휴직의사 통보 후에는 틈나는 대로 인수인계 자료와 폴더를 정리해 놓았고, 주요 해외 파트너나 회사 내 동료들에게는 휴직 1개월 전쯤부터 휴직 사실을 알리고 인수인계 상황과 향후 대응 인력 등을 가능한 수시로 알렸다. 그리고, 휴직 당일까지 내가 마무리할 수 있는 업무는 쥐어짜듯이 마무리했다. 팀 내에서도 인수인계 회의를 3번이나 하고, 휴직 당일에도 인수인계 내용에 대한 추가 회의를 하고 나왔으니 말이다.


인수인계 과정에서 꽤나 재미있던 점은, 내가 담당하던 미주/유럽 지역의 법인 직원이나 해외 법무법인 변호사들, 심지어는 분쟁 상대방들까지도 내 육아휴직 소식에 모두 '축하한다' '육아휴직 기간은 너와 아이에게 모두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거다'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는 식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는데, 한국 본사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아빠가 육아휴직을 한다고?' '이직 준비하려고?'와 같은 식의 진위를 의심하는 반응이었다. '뭐 하러 1년이나 필요해?'라는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나중엔 웃어넘기곤 했으니 말이다.


뉴스로만 보았는데, 실제 육아휴직을 써보니 한국에서 아빠 육아휴직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성숙하게 정착되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아니면 우리 회사만 그런 건가 (씁쓸).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아빠 육아휴직'이 아직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연스러운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만약 아빠 육아휴직을 고민한다면 직장에서 휴직 통보기간이나 인수인계 준비 정도를 고려할 때 이왕이면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나는 휴직 전에 팀원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취지로 소소한 선물도 돌리고 나왔는데 다들 놀라면서도 좋아했다.


어찌 되었든, 아빠 육아휴직에 대한 인식은 이 시대 아빠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니 말이다.




아, 참.


육아휴직을 한다고 했더니 회사에서 육아를 병행하거나 육아휴직 후 복직했던 여직원들이 '한 달만 지나면 회사로 뛰어서 돌아오고 싶을걸요?'라는 말들을 많이 해서 겁을 많이 먹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만은 않으니 아빠들이 너무 지레 겁을 먹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회사를 다니며 경추 디스크가 생기고, 고질적인 편두통에 코골이, 이갈이, 그리고 잘 때 머리 뜯는 습관(?)과 더불어, 스트레스 해소 방식으로 당충전을 택한 바람에 작년 초 고지혈증 위험군까지도 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는데, 육아휴직을 한 지 2주 만에 모든 증상이 싹 사라졌다. 아내가 신기해할 정도로 코골이, 이갈이, 머리 뜯기가 사라졌고, 매일 저녁만 되면 찾아온 편두통도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으며, 집에서 과일 등으로 섭취하는 당 외에는 딱히 흡입할 당분도 없고 또 딱히 당기지도 않게 되었다. 심지어 회사 다닐 때는 하루만 근무해도 수염이 너무 많이 자라 매일 면도를 해야 했는데 지금 휴직 중에는 수염을 1주일에 한 번만 깎아도 될 정도로 수염도 안 난다. 수염이 스트레스 수치와 관련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지난 한 달 여 동안 육아의 단조로우면서도 다채로운 일상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아이가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 기상 시간은 출근 때와 거의 비슷하고, 밥 먹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놀다가 잠시 쉬고 다시 반복하는 이 일상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른바 육아 적성(?)은 사람의 성향에 따라 또 환경마다 매우 다를 테지만, 어쨌든 아빠가 육아휴직하면 '무조건' 힘들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례는 될 수 있겠다.


아직까지는, 딱히 회사에 뛰어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회사 근처 석촌호수 산책로는 조금 그립다. 하지만, 결코 뛰어서 돌아가고 싶은 정도는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