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집에서 육아를 하며 바쁘게 지내느라 회사일을 거의 잊다시피 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팀장님의 '미안한데 인수인계 때 OOO 관련해서 변호사님이 말하신 거 있잖아요..'라는 한 마디에 모든 기억들이 되살아나며 나도 모르게 속사포처럼 내용을 설명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평소와 내 목소리 톤이 달라져서일까. 전화가 조금 길어지니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다리에 매달리며 울기 시작해서 급하게 전화를 마무리했다. 아이를 간신히 안아 달래고 난 뒤, 소파에 앉아 생각했다.
'아. 그렇지. 내가 회사를 다녔었지.'
나는 진급한 해 바로 휴직했다.
작년에 조기 진급을 했다. 1년도 아니고 2년을 앞당긴 이례적인 진급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나를 좋게 봐주신 실장님과 팀장님이 직접 인사팀과 윗분들을 설득해서 간신히(?) 얻어낸 결과였다.
매출로 말하는 영업 직군도 아니고, 성과를 정량화하기 어려운 지원부서는 조기 진급이 통상 어렵다. 다행히 나는 수년간 주요 프로젝트에 꾸준히 참석하며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지만 여러 임원분들과 일할 기회가 많았는데, 진급심사를 주로 임원들이 하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온 케이스였다고 들었다.
그래서 육아휴직에 대한 고민이 더 깊었다. 그렇게 어렵게 진급한 그 해에 뜬금없이 휴직이라니.
회사에서 일을 나름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성실했다기보단 깔끔하게(?) 집에 가고 싶어서 어지간해서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성격이었고, 어려운 이슈라면 초벌 의견이라도 마무리해서 팀 내에 공유하고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일을 빨리 처리(?)하다 보니 유관부서에서 일 자체가 나한테 많이 넘어오고, 그러다 보니 일의 양만큼 스트레스가 쌓이다 휴직 전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폭발하곤 했다.
'아니 대체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이래!'
나 하나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간다.
'매일 전화해서 괴롭힐 거다'라며 웃으시던 실장님의 농담과는 달리, 육아휴직 후 45일 동안 단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물론 오늘 팀장님과 통화를 해보니 몇 번 연락이 올만한 위기(?)가 있었으나, 어찌 되었든 일과 관련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오늘 연락 중 잠시 논의한 건도 휴직 전에 담당하던 여러 프로젝트 중 하나였는데, 작년 여름 이후 지금껏 본격적인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당시 협상 전략 관련하여 유관부서 피드백이 없어 혼자 스트레스 받아가며 북 치고 장구치고 했었는데, 결국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나 없이도 회사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휴직을 하고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회사에게 나는 '일시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작년 말 휴직을 고민하며 '그래도 조기 진급에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망설이던 내 모습이 무색하게, 회사는 내가 진급했었다는 사실 자체를 금방 잊었다. 또한, 휴직 전 매일 3~4개의 회의를 하고 당일에도 회의를 해야 할 정도로 나에게 미련이 있어 보이던 회사는 휴직처리와 동시에 내게 모든 연락을 끊었다.
입사도, 진급도, 휴직도, 그리고 퇴사도, 회사 입장에서 직원인 나의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들이었다. 내가 있든 없든 기업은 그저 치열하게 내일을 준비하며 오늘을 감당할 뿐이고, 직원인 나의 모든 것은 그 과정에 함께할 때만 계속 유효한 것이다.
회사에게 나는 철저히 '일시적'인 존재였다.
이 사소한 깨달음이 나에게는 섭섭함보다는 후련함으로 다가왔다.
회사에서 일할 때 항상 중압감과 부담감에 눌려 살았다. 회사에서 나의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체득하지 못했던 탓이다. 잠시 회사일을 쉬고 45일이 지나서야, 내가 회사에게 철저히 '일시적'인 존재임을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회사에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할 때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결국 내 존재가 '계속'되는 곳은 회사가 아닌 가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지금 하고 있는 육아의 일상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앞으로 삶의 무게추를 잘 조정하며 살아야겠다. 직장과 가정, 내가 일시적인 곳과 그렇지 않은 곳 가운데에서 말이다.
회사 연락을 받은 후, 첫째 아이와 함께 그린 우리 집 (좌측부터 아빠 - 첫째 아이 -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