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모시던 임원 분이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내 나이가 그분의 실제 아드님들과 비슷해서였는지, 이런저런 삶의 조언들을 해주시곤 했었다. 그분 밑에서 일하며 결혼도 하고, 첫째 아이도 낳았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복귀한 어느 날, 임원 분과 둘이 회의에 가다가 '화장실 청소'와 '설거지'가 내 담당이라 식기세척기를 사야겠다며 농담을 했는데, 임원 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들으시면 너무 슬프시겠네. 귀하게 키운 아들인데 결혼하고 손에 물이나 묻히며 산다니."
당시에는 조금 충격이었달까. 당황했달까. 뭐라 대답할지 몰라서 '하하하...' 웃어버리고 말았는데, 집에 오면서 곱씹을수록 혼란스러웠던 기억이다.
'아내도 장인, 장모님이 귀하게 키운 외동딸인데.. 장모님이 저 말을 들으시면 참 슬프시겠다' 싶었다.
그러면서도 다행이었다. 30년 전 즈음에는 당연했던 저 말이 이제는 당황스러운 말이 되었다는 것이.
"1년? 남자가?"
육아휴직을 앞두고 인수인계를 하던 기간, 특허부서와 회의를 하고 나오는 길에 휴직 커밍아웃(?)을 했다. 당시 특허부서의 그룹장이셨던 이사님이 "그럼 기간은 어느 정도?"라고 물어보셔서 "1년이요"라고 대답했더니 화들짝 놀라시며 말씀하셨다.
"1년? 남자가?"
당시 우리부서와 특허부서가 함께 일할 일이 많기도 했고, 특별히 나는 특허부서 분들과 친분이 있는 편이었기에, 일부러 회의실 밖에서 큰 소리로 이사님께 말했다.
"이사님. 손잡고 노동청 한 번 가실래요?"
하필 회의실 앞이 특허부서 자리였는데, 저 한 마디에 모두들 빵 터져서 웃고, 착하셨던 이사님도 얼굴이 빨개지시며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 와중에 특허부서 부장님은 '그러게. 법무팀 앞에서 위험한 말을 하셨네'라며 한 번 더 놀리시고). 그렇게 웃으면서 서로 인사하고 복도에서 헤어지던 길, 이사님이 머리를 긁적이며 하셨던 말이다.
"아... 남자도 육아휴직을 길게 쓸 수 있구나..."
"아빠가 육아휴직이라니, 대단하네요."
요즘 아내와 함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내가 듣는 말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어머. 아이 둘 키우시느라 어머니가 고생 많으시겠어요. 힘들어서 어떡해요"
내가 육아휴직을 해서 함께 육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워한다. 그러면서 내게 하는 말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어머. 아빠가 육아휴직... 너무 대단하시네요."
그리고 항상, 궁금증의 눈빛이 나를 스친다.
'뭐지. 아빠가 왜 1년이나 육아휴직을 했지. 무슨 사연이 있나?'
몇몇 분들은 직접 물어보시기도 한다. 초반에는 구구절절 설명했는데 이젠 간단히 대답한다.
"둘째 태어나고 아내가 애 둘 혼자 보기 힘들 것 같아서요."
시간이 흐르며 인식이 변해가길
사실, 누군가를 탓할 것은 없다.
나를 아껴주시던 임원 분이 사회에 나오셨던 30년 전에는 남자가 집에서 청소와 설거지를 하는 것이 어색했을 것이고, '남자가? 1년?'을 외치셨던 이사님이 사회에 나오셨던 20년 전에는 남자가 육아휴직을 쓰는 것이 어색한 일이었을 것이다. 40년 전 사회에 나오셨던 우리 아빠도 집에서 설거지나 청소 안 하셨다 (평일에는 밤늦게 오시고 주말에도 출근하셨으니 사실 집에 계시는 시간 자체가 별로 없으셨지만).
시간이 흐르며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적 인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두 분은 그 더디지만 멈추지 않던 움직임을 놓치신 것이고. 그러다 함께 일하는 젊은 직원의 삶을 보고 깜짝 놀라신 거다. 일하고 집에 돌아가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거기에 더해 1년이나 육아휴직을 쓰는 남자 직원이라니.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의 육아휴직'도 '여자의 육아휴직' 만큼이나 당연해지길 기대해 본다. 그래서 육아휴직 중인 아빠들이 '휴직 사유'에 대해 더 이상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약간 두려워지긴 한다. 혹시 10~20년쯤 후에 나도 젊은 직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남자가 육아휴직 2년?"
무려 40년 전 사회생활 입문하신 우리 아빠는 이제 배고픈 손녀딸 눈치 보며 요리하시는 중